올림픽 리더, 美의 두얼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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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미국은 진정 올림픽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가. 세계 스포츠 리더 미국의 일방주의는 이대로 좋은가. 지금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리고 있는 제19회 겨울올림픽을 현지에서 지켜보면서 이러한 두 가지 의문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대회 종반에 접어든 시점에서 이런저런 시비와 '반칙 올림픽'이란 불명예스러운 비판을 받고 있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무엇보다 근대올림픽의 성공에 가장 기여한 미국에서 올림픽 정신의 실종을 보는 마음은 참으로 착잡하다. 개회식에서 찢어진 성조기의 입장, 군인들의 삼엄한 경비에 아랑곳 없이 솔트레이크 시티 겨울올림픽은 빈틈없이 짜인 호화무대로서 새로운 모델이 되기에 충분하다. 델타센터 아이스링크의 만석관중,로키고원의 대자연을 최대한 살린 스키인프라, 그리고 헌신적인 자원봉사자의 물결과 스포츠 마케팅의 대히트-. 유럽 어느 곳에서도 보기 어려웠던 상업 올림픽의 성공작이었다.

이러한 긍정효과에도 불구하고 솔트레이크시티에 모인 올림픽 패밀리들의 반응은 결코 긍정적인 것 같지만은 않다.'마음속의 불을 밝혀라'라는 대회 캐치프레이즈의 숨은 뜻은 어떻든 과연 무슨 불을 밝히느냐가 중요하다. 평화의 불인가, 아니면 승리의 불인가.

상상의 비약일까. 베레모의 미국 선수단은 그야말로 전사(戰士)처럼 강해 보였으며 미국 아이스하키팀의 성화 점화는 챔피언 정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었다. 여기서 세계가 함께 어우러져 더불어 살아가는 미국의 시민정신을 보여주었으면 어떠했을까.

유타의 중심 솔트레이크 시티는 모르몬교의 도시로 더욱 유명하다. 유흥의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는 신앙의 낙원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솔트레이크시티는 올림픽 유치과정에서 드러난 로비 스캔들로 올림픽 운동에 씻지 못할 상처를 준 바 있다. 그런가하면 1984년 로스앤젤레스, 96년 애틀랜타에서 등장한 코비자(코카콜라-비자카드)올림픽의 상업주의는 지금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이 그 불명예를 회복하고 진정한 올림픽 리더십을 보여주려 한다면, 테러와의 전쟁 이후 세계의 갈등을 극복하는 평화와 공존의 스포츠 제전을 만들려 한다면 다른 민족, 다른 나라들을 들러리가 아닌 파트너로 삼아야 했다.

미국 시민의 스포츠 열정은 대단하다. 경기장마다 입장권이 매진되고 길거리 곳곳에 암표상이 들끓는 올림픽 특수는 특히 겨울올림픽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경기장에선 자국선수를 일방 응원하는 함성이 요란하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열광케 하는가. 어쩌면 초강대국의 자부심과 애국심이 이러한 응집력을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미국내 여론은 다양하다.이것도 하나의 지역주의인지 일부 신문들은 연일 미국승리만을 대서특필하고 일부에선 다른 나라의 반감을 살 수도 있는 미국식 우월주의, 제일주의를 경고하고 있다. 아무리 승부의 세계에서 승자만이 인정받는다지만 미국이 곧 세계일 수는 없다. 성조기는 이 대회에 참가한 77개국 국기의 하나일 뿐이다.

이번 대회가 의도하고 표방한 '강력한 미국'의 목적을 실현했다 해도 '스포츠의 세계는 하나'라는 통합정신과 평등주의를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스포츠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힘의 논리에 지배되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런가하면 쇼트트랙에서 드러난 반칙승부와 판정시비, 그리고 언론의 힘을 업은 승리자의 위세는 올림피즘의 선구자와는 또 다른 얼굴이다. 세계 어디를 가나 홈 어드밴티지라는 텃세는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충돌이 심한 쇼트트랙이라는 경기의 특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판정 문제로 해서 서울올림픽 때처럼 이를 민족감정이나 문화충돌로 확대해 간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2002 월드컵 축구를 눈앞에 둔 우리로서는 이 모든 것이 좋은 교훈이 된다.미국과 같은 두 얼굴이면 어떻고 세 얼굴이면 어떠하랴. 우리 나름대로 성공의 지혜를 얻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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