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전쟁,석유의 정치학-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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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007,언리미티드>
원제=007,The World is not Enough(1999)
감독=마이클 엡티드
주연=피어스 브로스넌, 소피 마르소, 로버트 칼라일| 터키의 이스탄불이 폭파되면 유럽은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카스피해를 우회하는 송유관을 쓸 수밖에 없을까.
19번째 007시리즈 '언리미티드'의 이같은 기본 가정은 9·11 테러 이후 성립되기 어려울 것 같다. 카스피해 연안에서 수십억 달러짜리 공사계획들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과 러시아를 향하던 기존 송유관에, 탈레반정권의 붕괴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뻗어나오는 파이프라인 공사계획도 힘을 얻을 것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최근 바쿠(아제르바이잔)~트빌리시(그루지야)~제이한(터키)을 잇는 송유관 계획에 동참할 뜻을 비추기도 했다.
'언리미티드'에서 석유재벌 엘렉트라 킹(소피 마르소)은 이스탄불을 폭파하기 위해 무리수를 둔다. 자신을 납치했던 테러리스트 르나드(로버트 칼라일)와 손잡고 카자흐스탄에서 핵무기를 탈취해 이스탄불을 파괴한다는 계획이다. 물론 이를 막은 것은 제임스 본드(피어스 브로스넌)다.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카스피해 주변이 소련의 변방에서 세계인의 주목을 끌게 된 배경에는 석유가 있다. 1994년 이후 세계의 마지막 유전지대임이 확인되자 숱한 서방 국가들이 앞다퉈 투자했고 이 과정에서 벌어진 음모와 암투가 이 오락영화 시리즈의 배경이다. 현재까지 확인된 카스피해 연안의 석유 매장량은 미미하다.
러시아 쪽 매장량을 빼면 2000년 말 기준으로 1백50억 배럴 정도다. 하지만 추정 매장량은 이보다 훨씬 많다. 카자흐스탄에만 5백억 배럴이 묻혀있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카스피해 바닥에 묻혀 있는 석유에 대해서는 아직 추정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일부 연안국들은 카스피해를 '바다'가 아닌 '호수'라고 주장하면서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세계 강국들이 카스피해로 몰려드는 것은 당연하며, 그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경제성장을 위해 더욱 많은 석유가 필요한데 석유는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40년쯤 뒤 인류가 석유 고갈 위기에 처할 것으로 보고 있다.
딕 체니 부통령을 책임자로 한 미국 정부가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2020년까지 미국은 33%의 석유가 더 필요하다. '에너지 안보' 문제가 거론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에너지 전쟁으로 보려는 시각은 이런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계적인 에너지 확보 경쟁에 개발도상국 중국도 가세했다. 2000년 기준으로 중국은 세계 2위의 원유 생산국이지만 93년부터는 석유 수입국이 됐다. 급증하는 소비를 자국 생산만으론 충당할 수 없다. 카스피해 연안은 중국의 경제발전에도 변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카스피해가 중동의 대안일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70년대 석유위기 이후 선진국들은 대체 에너지 개발과 함께 새로운 유전 개발을 통해 중동의 자원 무기화 전략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70년대 70%에 육박했던 중동 석유의 세계시장 점유률은 50%까지 떨어졌다. 최근 유가 하락을 막지 못하는 무기력한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보면 선진국의 전략이 어느 정도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언리미티드'는 빠른 화면 전환과 볼거리 제공에 주력했을 뿐 카스피해 연안에서 펼쳐지는 석유 기업들의 갈등을 제대로 보여주진 못했다.
그래도 건질 것이 적지 않다. 말로만 듣던 카스피해 연안 유전과 각국의 풍물을 볼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송유관은 영화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장면이다. 바쿠·이스탄불과 카자흐스탄의 이국적인 정취도 느낄 수 있다.
이재광 경제연구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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