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보통 국가' 전락 조짐 보이는 독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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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독일에 오래 거주한 교민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요즘 독일이 옛날 같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보통 통일 이후 나빠진 경제사정을 언급할 때 쓴다.

독일특파원 근무가 두 번째인 기자도 같은 느낌이다. 경제사정만이 아니다.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 길거리에서 여간해선 들을 수 없던 신경질적인 자동차 경적소리가 잦아졌다. 거리도 예전보다 훨씬 지저분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독일이 '일류국가'에서 '보통국가'로 전락해 가는 징후는 이밖에도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북한에 지원 중인 쇠고기가 적절한 광우병 검사를 거치지 않은 것이 단적인 예다. 이 때문에 독일 정부는 28일 현지에 도착한 2차분의 입항을 보류했다. 큰 망신이다.

이런 허술한 일처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독일식'과는 거리가 멀다.'독일식'이란 무엇보다도 분 단위까지 지키는 시내버스, 초 단위까지 어김없다는 열차의 도착.출발시간이 상징하는 정확성을 가리킨다. 독일사람들이 '맞다'는 뜻으로 자주 쓰는 '게나우(genau)'란 단어가 적어도 이번 일처리에선 실종된 것이다. 이번 일로 독일의 국가 이미지는 크게 훼손됐다.

특히 기아에 시달리는 북한주민을 돕겠다는 '인도적 배려'까지 의심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됐다.

물론 독일이 지원한 쇠고기가 광우병에 감염됐을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견해도 많다. 검역회사가 광우병 검사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독일 정부가 규정한 방식으로 하지 않았을 뿐이란 것이다. 이 때문에 북한측도 현재 보류 중인 2차분의 하역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독일이 이처럼 '보통국가 증후군'을 하나 둘 보이고 있는 것도 결국은 통일의 후유증이란 분석이 유력하다. 여유 없이 쫓기다 보니 곳곳에서 나사가 풀린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에서 보듯 현장 공무원들의 무사안일이야말로 '보통국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본받아선 안될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유재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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