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리콴유를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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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헨리 키신저는 싱가포르의 전 총리 리콴유(李光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에는 짝이 맞지 않는 것들(Asymmetries)이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리콴유와 같이 지도자의 능력과 그가 다스리는 나라의 힘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리처드 닉슨은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만약 리콴유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 살았다면 그는 처칠.디스라엘리.글래드스턴 같은 인물이 됐을 것이다." 처칠.디스라엘리.글래드스턴은 영국의 명재상들이었다.

리콴유가 작은 도시국가의 지도자로는 자격이 넘친다는 평가는 절반만 옳다. 리콴유는 40년 장기집권하면서 싱가포르를 정치적 안정, 경제력, 국민의 질서의식, 공무원들의 청렴도에서 세계 초일류의 나라로 키워냈다.

그는 자신의 큰 그릇을 작은 도시국가에 내려 맞추지 않고 작은 도시국가를 자신의 큰 그릇에 올려 맞춘 것이다. 싱가포르의 척박한 경제지리적 조건을 생각하면 그것은 거의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과 같았다.

*** 공부하는 지도자의 모범

그는 1990년 아직도 건강한 67세의 나이에 젊은 후계자에게 권력을 넘기고 제2선으로 물러난 후 세계를 무대로 정력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은 받지 않았지만 세계적인 현인(賢人)으로 존경받는다.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라는 그의 7백30쪽의 방대한 책은 국제정세의 정확한 분석과 예리한 통찰력에서 어떤 전문가들의 저서에도 뒤지지 않는다.

정초부터 남의 나라의 잘난 지도자 얘기를 하는 것은 12월의 대선을 향해 다시 어지러운 정치의 계절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누구를 뽑을 것인가, 누가 대통령 될 조건을 더 많이 갖췄는가를 심각하게 물으면서 유용한 벤치마크로 리콴유를 생각하게 된다.

리콴유는 탁월한 지도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실천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그는 나이 47세, 총리 재임 10년째 되던 68년 하버드대학 정치대학원에서 두달의 안식년 휴가를 보냈다. 그는 기숙사에서 일반학생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세미나 참석, 교수 및 학생들과의 토론, 하버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들과의 교환(交歡)으로 집중적인 재충전을 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도 야당 시절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몇달을 보냈고,이회창(李會昌) 한나라당 총재와 이인제(李仁濟) 민주당 고문도 97년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 미국으로 갔다.

시간적으로 재충전하기에 여유있는 입장에 있던 그들이 현지의 전문가들이나 지도층 사람들과 얼마나 생산적이고 진지한 토론을 하면서 사고의 지평을 넓혔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리콴유는 80년대부터는 거의 해마다 중국을 '학습방문'해 중국의 미래에 대한 중국 지도부의 야망과 동기와 전략을 들었다. 하버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도 정기적으로 방문해 그곳 교수들, 그 나라 지도자들과의 허심탄회한 토론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흡수했다. 그는 60년대부터 모든 미국 대통령들과의 잦은 만남을 통해 69년 미국의 아시아분쟁 개입을 축소하는 닉슨 독트린과 72년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96년 싱가포르에서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리콴유가 나눈 대화는 공부하는 총리와 그렇지 않은 대통령의 비대칭적인 대화의 전형(典型)이다. 리콴유에 따르면 金대통령은 매일 아침 몇 ㎞씩 조깅을 한다고 자랑하고는 가족을 중요시하는 것이 한국과 싱가포르가 공유하는 가치관이라고 말했다. 리콴유는 미국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이 한국과 싱가포르의 공통점이라고 응수했다.

*** 대선후보 視野 글로벌화를

모든 지도자가 리콴유와 같을 수는 없다. 어른이 돼 베이징(北京)표준어를 배우고, 아들에게 러시아어 공부를 시키고, 후계자에게 개인교수까지 붙여 연설수업을 시킨 것은 가부장적이라고 하자. 그러나 그는 공부하는 총리의 모범을 보였다.

대선후보들은 리콴유의 통치철학이 싱가포르의 경제지리적 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21세기 한국의 운명을 좌우한다. 이번에는 시야의 글로벌화가 후보 자질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돼야 할 것이다. 대선후보들에게 우선 『제3세계에서 제1세계로』를 한번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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