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희의 노래누리] 한국 가수들 호텔서 공연하는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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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지난 해 마지막 토요일이었던 12월 29일 서울의 건국대학교를 찾았습니다. 1년 만에 만난 반가운 친구와 의기 투합해 지갑 속에 숨겨 뒀던 비장의 콘서트 티켓을 꺼낸 겁니다.

오후 7시. 매서운 겨울 바람을 뚫고 찾아간 건국대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는 최근 7집 '에그'로 건재를 확인한 가수 이승환씨의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인터넷 예매 1초 만에 매진'이라는 진기록을 수립한 공연답게 열기가 대단하더군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저에게 그 공연은 실망을 넘어 조금은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결코 이승환씨나 공연 준비팀을 폄하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의 공연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공연 중 하나라는 건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사실이고, 저도 동의하기에 그날 많은 공연에서 택한 것입니다.

무대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미리 준비한 영상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등 정성들인 아이디어도 훌륭했고,'라이브의 황제'라는 별명답게 관객을 장악하는 이승환씨의 카리스마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흔히 '사운드'라고 부르는 음향이 너무도 열악했습니다. 가슴을 쿵쿵 울리는 저음은 온데간데 없고, 중음과 고음은 한데 뒤엉킨데다가, 이승환씨의 보컬은 시종 찢어져 들려 가사를 알아듣기조차 힘들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기본적으로 대중음악을 위해 설계된 공연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음향 장비 설치에 애를 써도 제대로 된 음이 나오기 힘든 구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승환씨 공연을 예로 든 것은 '최고라는 이승환 공연이 이 정도인데 다른 공연은 오죽 하겠느냐'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월드컵을 여는 대도시 서울에 제대로 된 대형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 하나 없이, 각종 대학들의 강당이나, 무슨 무슨 운동 경기장이나, 앞사람의 머리에 가려 무대도 안보이는 호텔 연회장을 빌려서 공연하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현실을 한번 짚어보자는 겁니다.

'가수의 보컬 역량이 제대로 드러나는 공연장에서 음악을 듣는 훈련을 받은 대중이 진짜 가수들을 응원할 때 대중음악 발전이 있다'고 말하면 단편적일까요.

한국 최고 대중가수 조용필씨가 해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게 결코 자랑이 아닙니다.

"대중음악 공연장이 아니기 때문에 음향 세팅에 무지 애를 먹는다"는 그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대중음악 전문 공연장에서 그가, 그리고 수많은 뮤지션들이 공연하는 걸 보고 싶습니다.

그날 이승환씨의 공연장에서, 눈과 비가 뒤섞인 겨울 바람을 헤치고 공연장을 찾은 젊은 팬들의 환호는 어쩌면 안쓰러운 것이었습니다.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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