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좋다] 따뜻한 추억 훈훈한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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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사나흘 전 별똥별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별과 멀어진 많은 도시 사람들도 밤잠 자지않고 까맣게 맑은 밤하늘 속에서 펼쳐진 별들의 쇼를 감상했다. 유년 시절 고향의 밤 마당에서 올려다 본 순정한 하늘에서와 같이. 별들의 짧고 명징한 추락과 함께 계절도 겨울 한가운데로 들어가고 있다. 얼음처럼 투명한 겨울 하늘이었기에 불빛으로 오염된 도시에서도 그렇게 많은 별똥별이 우리에게로 와서 그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겨울은 그런 별똥별의 계절이다. 수수만년 별이었던 별똥별은 또 다시 별로 떠오를 것을 기약하며 한 줌의 빛과 재로 우주를 가른다. 난분분, 울울창창했던 봄.여름.가을도 겨울 속으로 들어가며 또 다시 그 계절로 돌아올 것을 기약한다. 한 번 무엇인 것은 긴 세월, 먼 세상 돌고돌아 다시 순정한 그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알려주는 계절이 겨울이다.

종착역에 이르러 노루꼬리 만큼 짧아진 해는 마지막 투명한 햇살로 정갈한 것,따스한 것들을 추억하고 기리게 만든다. 처마밑 겨우 한뼘 남은 햇살 아래 참새의 오동통한 앞가슴이 따스하다. 어머니나 누나가 뜨개질 했을 털옷을 입은 아이들의 바알간 얼굴도 따스하다. 촘촘한 새끼 옷을 새로 입은 잎 다 떨군 가로수들도 따스하다.

벙어리 장갑에 손도 따뜻하다. 손가락 가락 나누지 않고 함께 감쌈에 마음 먼저 훈훈하게 덥혀 온다. 눈도 서울과 시골, 아파트와 달동네, 너와 나의 경계와 거리를 하얗게 지우며 함께 감싸안는다. 그래 겨울은 스키같이 두 짝의 계절이 아니라 스노보드 같이 한개로 가는 계절이다. 벙어리 장갑같이 듬직하고 묵묵히 함께 견뎌내게 하는 계절이다.

저물녘 피어오르는 굴뚝의 연기는 우리를 고프게 한다.겨울 한기에 포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우리를 따스하게 한다. 연기의 냄새로 지금 타오르는 나무의 당당했던 생을 기억케하며 추억을 불러모은다. 고픔과 추억으로 모든 이들을 불러모아 둥그렇게 한자리에 앉아 서로의 체온을 나누게 만든다.

고층 아파트 단지 입구 군고구마 드럼통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냄새는 왼쪽.오른쪽으로, 위.아래로 닫히고 갇힌 아파트 가가호호를 한 동네로 모은다. 아르바이트 학생, 실직자의 군고구마 통에서는 또 무엇이 될 희망의 기약이 활활 피어오른다. 오늘 어느 산모퉁이 돌아 카페의 페치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어떤 나무와 차의 향기로 우리를 한자리에 불러모으고 있을까.

호 호호 입김을 불면 유리창에 추억이 묻어나는 계절이 겨울이다. 추억은 겨울 외양간 되새김질 하는 누런 소의 허연 입김.콧김 같은 훗훗하고 따스한 생명력이다. 추억이 없는 희망은 이육사 시인의 시 '강철로 만든 무지개'같은 겨울처럼 매섭고 춥다. 겨울 창문에 서린 입김은 추억과 희망이 함께 있는 현실이다. 겨울은 죽은 계절이 아니라 반추와 희망이 현재와 함께 하며 정갈하고 따뜻하게 살아 있는 계절이다.

"이 숲의 주인이 누군지 알것 같네./그의 집은 마을에 있어./나 여기 서서 그의 숲에 눈이/쌓이는 걸 지켜보는 걸 그는 모를테지.//내 조랑말은 괴이하다 생각하리./숲과 얼어붙은 호수 사이 어디/가까운 농가도 없는데 멈춰선 것을./한 해 가장 캄캄한 이 저녁에.//말은 방울을 한번 흔들어 대면서/혹시 무슨 까닭이냐 묻기나 하듯./그밖엔 오로지 가볍게 스치는/바람 소리,솜같은 눈송이 뿐//숲은 아름다워라, 어둡고 깊어./그러나 난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네./그리고 잠들기 전 갈 길이 머네/잠들기 전 갈 길이 멀어."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리는 저녁 숲가에 멈춰서'는 눈 내리는 숲, 겨울 한 가운데의 마음 풍경을 눈에 보이듯 그리고 있다. 계절의 귀가길에서, 삶의 여정에서 걸음을 잠깐 멈추고 눈 내리는 호젓한 숲 속을 바라보라. 겨울 숲은 어둡고 깊지 않은가. 포근하고 아름다워 그 숲에 지친 몸 눕히고 싶지만 아직 우리의 갈 길은 멀지 않은가.'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또 먼 길 떠날 채비를 해야 하지 않은가.

'지켜야 할 약속',정갈하고 따스함으로 하여 나뉨 없는 세상을 추억하며 기약하는 계절이 겨울이다. 약속처럼,별똥별처럼 눈은 내려 온세상을 은백의 정갈한 한세상으로 따스히 감쌀 것이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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