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지 않는 빈곤 <하> 부양 의무 족쇄 해법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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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서울 양천구에 사는 최모(57·여)씨의 딸(22)은 최근 혼자 서울 강남의 친척집으로 이사했다. 어머니가 기초수급자 자격을 되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씨는 지난달 수급자에서 탈락해 55만원의 정부 지원금(생계비)이 끊겼다. 딸이 취직해 120만원을 벌고 있는 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최씨는 2급 중증 장애인이어서 일을 할 수 없다.

최씨의 딸이 이사한 이유는 부양의무자 규정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와 따로 살아야 부양의무자로 간주된다. 같이 살면서 한 식구일 때보다 따로 살아야 정부 지원을 받기가 훨씬 쉬워진다. 이사하면 기준(월소득 210만원)을 충족해 어머니가 기초수급자로 돌아가지만 같이 살면 기준(월 111만원)을 넘게 돼 그리 될 수 없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 김현곤(59) 연구원은 “부양의무자 규정이 가족이 같이 살지 못하도록 갈라 놓고 있다”고 말했다.

현행 기초생활보장제의 부양의무 규정은 국가의 복지 책임 상당 부분을 가족에게 맡기고 있다. 가족 부양을 강제하기 위해 곳곳에 까다로운 조항을 넣었고 그것이 비수급 빈곤층을 양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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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 자녀가 둘 있는 아들네와 홀어머니를 보자. 아들네 소득이 177만원을 넘지 않아야 부모 부양의무가 면제된다. 소득이 없더라도 1억5100만원(대도시 4인 가구 기준)이 넘는 주택이 있으면 안 된다. 도시의 높은 주거비나 교육비 등을 감안하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경기도 양평군 김모(71·여)씨는 돈 버는 둘째 아들 때문에 수급자가 못 됐다. 난방비가 없어 지난겨울에는 전기장판으로 살았다. 아들 소득은 기준(131만원)보다 높은 150만원. 양평군청 주민생활지원과 이성수씨는 “김씨의 아들이 이혼한 뒤 서울에서 혼자 살기도 빠듯한 형편”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가 2008년 부양의무자 4500가구를 조사한 결과 월소득이 200만원 미만인 사람이 62%에 달했다. 그만큼 자식도 팍팍하게 산다는 뜻이다.

‘모 아니면 도’ 식의 기준은 더 문제다. 4인 가구인 아들네의 월소득이 240만원일 경우 월 19만원의 부양 능력이 있다고 본다. 이를 감안해 홀어머니에게 13만원의 생계비가 나간다. 하지만 소득이 10만원 늘어 250만원이 되면 어머니는 수급자에서 탈락해 한 푼도 못 받는다. 아들 부담을 늘리고 생계비를 줄이는 게 아니라 아예 보호를 중단하는 것이다.

다 큰 자식의 생계가 어려울 경우 부양책임이 부모에게 간다. 경기도 남양주시 손모(51)씨는 소득과 재산이 없고 혼자 월세 10만원짜리 단칸방에 산다. 폐질환 때문에 일하기 힘들다. 이 조건만 보면 기초수급자가 돼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충남 천안에 사는 어머니(75) 명의로 된 1억8900만원 상당의 땅 때문이다. 재산이 1억2223만원을 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부양 능력이 있다고 판정한 것이다. 이처럼 비수급 빈곤층 중 23.4%의 부양책임을 부모가 떠안고 있다.

기초수급자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경기도 동두천시 윤모씨(61·남)씨는 지난해 8월 생계비가 37만원에서 3만7000원으로 줄었다. 일이 없던 두 딸네가 일용근로를 하면서 소득이 각각 273만원, 265만원이 됐기 때문이다. 두 딸이 약 33만원을 부양할 능력이 있다고 판정됐다.

빈곤문제연구소 류정순 소장은 “자식의 소득이 기준을 넘더라도 부모의 기초수급자 자격을 박탈하지 말고 생계비 지원금을 줄여 나가는 쪽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손대규 간사는 “부양의무자 규정을 없애고 부모의 상태만 따져 생계비를 지급한 뒤 잘사는 자식에게 돌려받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신성식 선임기자, 김정수 기자


미국·유럽선 자녀 소득·재산 안 따져
부양자 범위 넓은 일본도 법적 기준은 안 정해 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모두 우리의 국민기초생활보장제 같은 정부 차원의 빈곤층 지원제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자녀나 부모에게 부양의무를 철저히 떠넘기는 나라는 거의 없다. 미국·영국 등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는 지원 여부를 가릴 때 신청자와 그 배우자의 소득과 자산만 조사한다. 이들 국가에서는 ‘핵가족’ 개념이 비교적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혼한 부모가 미성년 자녀에 대한 부양 의무를 안 지키는 경우는 강력히 제재하지만 기혼 자녀와 부모 간의 부양의무를 법적으로 강제하지는 않는다.

독일·프랑스 등은 민법상 친척에 대한 부양 책임을 규정하고 있지만 부양의무를 지우기 위한 소득이나 재산 기준은 없다. 대신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이 여러 여건을 감안해 판정한다. 평균적인 생활 이상의 경제적 여유가 있다고 판단될 때만 부양 의무를 지운다.

일본은 부양 의무 기준이 좀 더 엄격하다. 자녀(부모)와 그 배우자로만 돼 있는 우리와 달리 3촌까지 부양 책임자에 포함된다. 하지만 일본도 법적으로 소득이나 재산 기준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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