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세상] 고은·김지하의 식지 않은 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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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우리는 함부로 시의 황금시대를 꿈꾸지 말아야 한다. 시인이 사회의 요직자가 되는 인위적인 자기옹호도 내버려야 한다. 시인이란 본질적으로 삶의 복합적 현장에서 그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존재다. 시인이란 황량한 세상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나 연민 또는 누가 이해해주기를 바라지 않는 순결한 분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이란 그의 시와 함께 세속적으로 자주 고아가 되는 존재다. "

활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분노, 때론 겨울 빈 골짜기를 불어가는 허허로운 바람소리 같은 시로 우리시대를 풍미하며 '국민시인' 으로 불려도 좋을 고은 시인이 다시 자신부터 시인의 기질을 다잡겠다 합니다.

서정시의 진실을 내건 시 전문계간지 '시와시학' 창간10주년 권두칼럼에서 고씨는 시와 문화 전반에 '서정의 혁명' 을 비장하게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고씨는 서정을 시의 본질적 능력인 감동으로 보며 그 요체를 순수와 리얼리티에서 찾고 있습니다. 순수란 시를 쓰는 마음의 헌신적 순수를 말하고 있군요.

도대체 현실도 사회도 없는 자폐적인 순수, 해서 아무런 제재도 받지않고 체제순응의 신분으로 시를 쓴다는 것은 시 자체의 순수한 불안조차 거절하는 비순수라며 지난 연대 제도권 내의 순수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리얼리티, 삶의 구체성을 통해 참여시도 다시 태어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순수와 리얼리티에 기초한 서정적 감동이 넘쳐야 기능성.효율성 등 오늘날 비정(非情)의 문화와 삶의 형식을 깨뜨리며 삼라만상과 감동적으로 같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서정적 혁명에 화답이라도 하듯 김지하 시인이 6년여의 시적 침묵을 깨뜨리고 '실천문학' 봄호에 6편의 시를 발표했습니다. 편편이 모골이 송연해지리 만큼 귀기(鬼氣)가 넘치는데 한 편 인용합니다.

"도망쳐 왔구나/알겠구나//슬픈 사랑 때문에/멀리멀리 도망쳐 왔구나//대웅전 너머 언덕 또 언덕/저 쓸쓸한 독수리 두 발톱 아래 깊이/숨어 있구나//드러날 그날까지/홀로 수천년을/호랑이 등 위에서/방울 칼 거울/거울 칼 방울/칼 방울 거울//그 사이 성좌는 팔방에 율려를 뿌리고/대륙은 끝없이 말씀을 흩었네라//영축산 비로암 뒤/숨죽인 북극전/내/이제야/문득 알겠구나//어찌해/당신이/서자인지를. " ( '북극전 2' 전문)

김지하씨는 어느 시대든 고아임을 먼저 자처할 영원한 주변인입니다. '순결한 분노' 로 독재시대 민주화를 숨죽여 흐느끼고, 죽임의 시대 대세에 반역하며 생명을 노래한 시인 아닙니까.

그가 긴 침묵 끝에 발표한 이번 시편들은 현실과 이상 등 대립항 사이의 반역과 섬김의 팽팽한 긴장이 시공을 초월하며 귀신까지도 감동시킬 것 같습니다.

헌신적 실천과 내적 삭임을 통해서만 비로소 다가설 수 있는 이러한 큰 감동, 서정을 회복하자고 고씨는 비장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를 비평하는 평론조차 서정화할 필요가 있음도 역설하고 있습니다.

평론이 작품의 감동적 자질을 제대로 못 살폈듯 그동안 우리의 문화예술, 나아가 사회가 감동없이 너무 지당한 명분과 논리로만 헛돌았다는데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소리로도 들립니다.

이경철 문화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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