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평생 무료진료 펼친 치의학계 큰어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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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무지한 제자는 후회하면서 눈물을 훔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일궈 놓은 업적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히 그리고 편안히 가십시오. "

지난 9일 서울 성북동 덕수교회. 6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춘근(李春根)서울대 명예교수의 장례예배에서 조사(弔詞)를 읽어내려가던 제자 이상철(李相喆)경희대 교수의 목이 메였다.

1942년부터 서울대 치대 교수를 맡아 온 고인은 우리나라 치의학계의 대부이자 산 역사였다. 고인은 서울대 대학원이 배출한 첫 치의학 전공 박사이자 구강외과 교수 1호다.

그는 59년 한국구강외과학회를 창설해 73년까지 회장을 맡아 활동하는 등 한국 치의학계를 정비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55년 그가 치대병원장을 맡을 때만 해도 워낙 시설이 형편없어 유솜이라는 미국재단을 통해 중고 치과 기자재를 들여와야만 했다. 미8군 치과 군의관들과 의학교류를 시작했던 것도 그가 병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정종평(鄭鍾平)서울대 치대 학장은 "매일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논문을 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며 "치과계의 태두를 잃었다는 큰 충격, 참담한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고 고인을 애도했다.

치의학계에서의 업적보다 그를 더 빛나게 하는 것은 평생 계속했던 봉사활동이다.

대한기독교치과의사회장.대한기독의사회장 등을 맡았던 고인은 덕수교회 낙도선교회장인 아내 백영숙(白英淑.80)씨와 함께 낙도 주민들을 위한 무료진료에 정성을 쏟았다.

또 61~86년 서울대 의대.치대.간호대의 의료봉사 서클인 TTC(생각하고 감사하는 클럽, Think & Thank Club)의 지도교수를 맡아 제자들과 함께 무의촌 진료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손인응 덕수교회 목사는 "고인은 철저한 봉사정신으로 인술(仁術)을 몸소 실천하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사역을 해온 진정한 신앙인이셨다" 고 회고했다.

"처음 선생님께서 무의촌 진료에 나섰을 때만 해도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동네가 많았습니다. 때문에 약품과 의료재 등을 구입하기 위해 사재를 털기도 하셨죠. " 김명진(金明鎭)서울대 치대 교수의 말이다.

교회를 나선 영구차는 벽제 장제장으로 향했다. 장례문화를 고쳐야 한다며 '죽으면 화장을 하라' 고 되뇌곤 했던 고인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큰아들 건주(健柱.52.한림대 교수)씨는 "화장한 뒤 유해를 뿌리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것까지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납골당에 모시게 됐다" 고 말했다.

봉사의 삶을 살며 인술을 펴왔던 고인의 죽음이 애통했던 탓일까. 가는 길을 더디게 하려는 듯 눈은 또 그렇게 흩날려 운구차 위에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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