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미국의 여소야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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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소야대(與小野大)상황은 미국에선 흔하다.

민주당 출신의 빌 클린턴 대통령도 취임 후 첫 2년을 제외하곤 6년 동안 거야(巨野) 공화당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여당이 다수였던 초기 그는 의회에 완패한 반면, 여소의 어려운 여건에선 타협과 강공을 적절히 구사하며 의회를 리드해 나갔다는 사실이다.

*** 여론 지지땐 밀어붙여

취임 초 그는 부인 힐러리 여사가 주도한 의료보장 확대안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세 부담 경감이란 공화당'의 정통 보수' 노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이다.

공화당의 강력 반대를 수적 우위로 헤쳐나가려던 클린턴은 결국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실패는 중간선거 패배로 나타났다. 클린턴으로선 뼈아픈 상처였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클린턴은 의회 전략을 새롭게 짰다.

민주당의 진보노선을 희생하고 보수 공화당 쪽으로 한발 다가선 것이다. 이른바 '신민주당' 이다.

그 속에 담긴 작은 정부, 연방적자 감소는 공화당이 주창하던 내용이다.

민주당 내부에선 전통노선 포기라고 비판했고, 언론은 '야당정책 훔치기' 라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이때 마련된 상생의 발판은 클린턴의 정치력 발휘에 큰 힘이 됐다.

그렇다고 의회와의 관계가 시종 원활했던 것은 아니다. 거부권을 몇차례씩 행사해야 했을 정도로 크고 작은 마찰이 되풀이됐다.

그때마다 클린턴이 동원한 무기는 여론이다. 여론의 지지를 이끌기 위해 노력했고 여론지지를 확인했을 때는 과감히 밀어붙였다.

경제활황까지 도와주는 덕에 그는 르윈스키와의 추잡한 섹스스캔들에도 불구하고 퇴임을 코앞에 두고 68%의 높은 지지율을 나타내고 있다.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게 틀림없다. 야당정책을 수용하는 유연성과 민의를 바탕으로 한 정치. 그게 클린턴 정치의 비결이요, 우리 정치에 아쉬운 대목이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 대사업을 추진하며 아예 여야 제휴를 이끌어낸 인물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복구하는 일이었다. 그는 유럽부흥을 위해 대대적 지원을 검토한다.

그러나 트루먼은 전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휘광에 가려 상대적으로 왜소했고 국민적 인기도 낮았다.

엄청난 국민부담이 수반되는 유럽부흥계획을 성사시키고 이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비쳤다.

당시 조지 마셜은 전쟁 영웅으로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추앙을 받았다. 트루먼은 그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하고 유럽지원계획을 '마셜플랜' 이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부족한 명망을 마셜로부터 구한 것이다.

그리곤 야당의 거물 아서 반덴버그 상원외교위원장을 찾아가 마셜플랜의 중요성과 세부적인 추진계획들을 성심으로 설명하고 협조를 구한다.

반덴버그는 그걸 흔쾌히 수용했고 의회 설득에 적극 나섰다. 마셜플랜은 지금까지도 금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마셜플랜은 트루먼의 용병술과 여야의 초당적 협력이 빚어낸 성공작이란게 학계의 평가다.

의원을 꿔주고 여야 총재가 서부활극 같은 '결투' 나 벌이는 술수정치.흙탕물정치와는 다른 그림이다.

거꾸로 다수 여당의 좋은 환경에도 불구, 죽을 쑨 대통령이 린든 존슨이다. 가난과 인종차별이 없는 '위대한 사회' 건설에 그는 야심만만하게 덤벼들었다. 여대의 힘으로 숱한 개혁법안들이 통과됐다.

그러나 무리하게 추진된 개혁정책은 인플레 가중 등 부작용을 불렀고, 도시빈민과 인종차별은 개선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내가 잘했다" 고 자화자찬을 늘어놨고 대중은 냉소로 응답했다.

*** 독선.數의 정치 안통해

베트남전 강행은 최대의 악수였다. 거센 반전(反戰)운동과 줄기찬 의회의 철군 주장에도 그는 귀를 막았다.

그건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간주했고 주변에서 그러한 의견을 제시하는 인물을 몰아내거나 멀리했다.

그리곤 의회 동의도 거치지 않은 채 추가파병을 결정했다. 베트남전 희생자는 무려 3백여만명. 소득 없이 인명.재산을 날린 대표적 실패정책으로 월남전은 기록돼 있다.

한 전기 집필자는 "존슨은 자신이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정책 비판을 자신에 대한 개인적 공격이라고 생각했다" 고 적고 있다.

우리 지도자 중 존슨 같은 인물은 없는지 돌아보게 된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정국 운영사례는 여소야대의 우리 정치판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독선과 수의 정치가 단기적으론 효험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어김없이 실패로 이어졌음을 경고하고 있다.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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