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코 소송 첫 판결 은행이 이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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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를 두고 기업과 은행 간에 벌어진 소송의 첫 판결에서 은행이 승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부장 임성근)는 8일 ㈜수산중공업이 “키코의 위험성을 은행이 알려주지 않아 손해를 봤다”며 우리은행과 한국씨티은행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반환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법원은 오히려 “수산중공업은 은행에 계약 해지 결제금인 3억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키코 계약으로 은행이 얻게 되는 이익이 다른 금융거래와 비교해 과하지 않다”며 키코가 은행에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됐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계약 체결 당시 대부분의 연구기관이 환율 하락을 전망했기 때문에 환율 급등으로 인한 가입자의 피해를 예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에 비춰 은행이 급격한 환율변동 위험에 대한 설명 의무를 어긴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수산중공업은 2008년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바람에 약 180억원의 손해를 보자 소송을 냈다.

최선욱 기자

◆키코(Knock In Knock Out)=원화가치 변동에 대비하기 위해 가입하는 파생금융상품. 원화가치가 일정한 범위를 유지하면 기업이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원화가치가 정해 놓은 수준 아래로 떨어지면(녹 인) 기업은 손실을 보고, 원화가치가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계약은 해지된다(녹 아웃).


[뉴스분석] 은행 “달러 보유 땐 기업 유리” 반박 주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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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키코 관련 소송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키코가 은행에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공정 계약이냐는 점. 수산중공업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버트 엥글 교수까지 불러 증명하려고 한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키코 계약으로 기업이 얻는 이익은 제한적인데, 손실은 무한대로 커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기업이 달러화를 가지고 있다면 원화값이 떨어질 때(환율 상승) 환차익을 보기 때문에 키코 손실을 만회할 수 있다”는 은행 측의 반박에 꺾였다. 예컨대 달러 대비 원화가치가 1000원에서 1200원으로 하락하면 기업은 키코 계약에서 손실을 볼 가능성이 크다. 반면 원화 가치의 하락으로 보유한 달러에선 환차익이 생긴다. 달러 없이 투기적 목적으로 키코 계약을 하지 않은 이상 키코가 기업에 일방적으로 불이익을 주는 상품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쟁점은 은행이 환율 상승으로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키코를 팔았느냐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 법원은 수산중공업이 키코 계약 전에도 환헤지를 위해 20여 건의 다른 파생금융상품을 거래했다는 데 주목했다. 기업이 위험을 몰라서가 아니라 당시엔 다른 상품보다 키코가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기에 계약을 했다고 본 것이다.

경원대 최성섭 교수는 “이번 판결은 파생금융상품 계약을 할 땐 기업이 상품의 손실 위험을 미리 알고 준비해야 한다는 점을 확인해 준 것”이라고 평했다.

이번 판결로 키코 소송이 일단락되는 건 아니다. 환헤지 피해 기업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날 “충분한 심리가 이뤄지지 않은 채 판결을 강행했다”며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은행연합회도 “긍정적인 판결이지만 나머지 사건도 모두 같은 판결이 나올지는 알 수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지법에 접수된 키코 사건은 모두 124건으로, 이제 1건에 대한 1심 선고가 내려졌을 뿐이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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