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이성철학에 반기든 프랑스 최고의 지성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해체'라는 개념으로 프랑스 최고의 철학자 반열에 오른 자크 데리다가 9일(현지시간) 타계했다. 74세.

지난해 췌장암 선고를 받고 투병해왔던 그는 3주 전 입원한 파리의 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로써 데리다는 알튀세르.라캉.푸코.바르트 등 이른바'68사상가'로 불리던 1960년대 사상가들 가운데 마지막으로 동료들을 따라갔다.

데리다의 철학은 '해체주의'로 요약된다.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의 전통적 중심뿌리는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성'이었다. 그는 이같은 서양철학의 이성적 전통을 비판한다. 과거에 이성이 인간 해방에 기여했다면, 이제 그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만든 개념들(역사.정치.혁명.주체 등)로부터 세계를 해방시키고자 한다.

그가 내세운'해체'란 개념에 대해 작가이자 르 피가로의 편집국장을 지낸 프란츠 올리비에 지스베르는 "하나의 개념과 체제 혹은 가치를 취해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시멘트'를 걷어냄으로써 그것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도발적이고 난해한 사유 세계로 인해 그의 철학은 지나치게 모호하고 허무주의적이란 비판도 받았다.

그는 특히 언어에 초점을 맞춰 철학 세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텍스트가 불변의 의미를 지닌다는 기존의 생각을 뒤집으며 글쓴이의 의도가 무조건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각 텍스트의 의미는 다극적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는 기존 철학계를 지배해온 명료성.통일성 개념과의 마찰이 불가피한 주장이었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니체.하이데거 같은 앞선 철학자의 사고 유파인 이른바'반(反) 철학'의 후계자로 여겨졌고, 오늘날 이성주의 철학의 대표자 격인 위르겐 하버마스와 쌍벽을 이루는 철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30년 7월 15일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명문 고등사범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와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조교 생활을 거친 후 65년 파리고등사범학교 철학교수로 임용됐다. 80년 소르본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프랑스와 미국의 대학을 오가며 후학을 양성했다.

82년에는 체코의 반정부 지식인들을 지원하다 체코 당국에 의해 구금된 적도 있고, 동성애자 차별 철폐 투쟁도 벌였다. '차이와 반복'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철학의 여백' '마르크스의 유령들' 등 8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성균관대 이종관 교수는 "그의 죽음은 세계 철학계의 한 축의 소멸이라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다"며 "더 오래 살았으면 앞으로 더 많은 철학적 상상력을 세계에 과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한편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발표해 "고인은 프랑스가 낳은 당대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이자 우리 시대 지적인 삶에서 주요 인사 중 한사람이었다"고 애도했다.

파리=박경덕 특파원,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