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또 사법개혁 폭풍이 부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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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리나라에서는 이 참에 법관 임용 제도까지 고쳐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또 한 차례 사법개혁의 회오리가 몰아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은 씁쓸하다.

오래전에 필자의 독일 지도교수가 서울중앙지방법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법원 건물을 보더니 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그래서 건물이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물어보았다. 대답은 이러했다.

“법원도 권력기관인데 권력기관의 건물이 이렇게 위압적인 모습을 갖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한번은 취리히 대학의 노교수를 모시고 서초동 법원에 간 적이 있다. 건물을 보더니 꼭 로켓 발사대처럼 생겼다고 해서 영접 나온 판사가 이 건물은 독수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때 이 분이 정색을 하고 한 말씀에 한 수 제대로 배웠다.

“법원이 왜 하늘을 날아다닐 생각을 하느냐, 법원은 모름지기 땅에 굳게 뿌리를 박고 있어 어떤 폭풍이 불더라도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법원의 판결이 국민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명제는 백 번 옳다. 아무리 법 제도와 법 이론이 복잡, 난해하더라도 황당한 판결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근자에 논란이 된 판결에 관한 보도를 보고 필자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검찰이 어떤 죄목으로 기소를 했는지, 검찰과 피고인이 어떤 증거를 제출했는지에 따라 판결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법관이 선고한 무죄 판결은 피고인이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검사가 기소한 죄목으로는 범죄의 구성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더구나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의 대원칙이 있다.

피고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이 원칙을 뒤집는다든가, 법관이 직권을 발동하여 마치 주부가 깍두기 버무리듯이 사건을 휘저어 심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법관 임용 제도의 문제점은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소송제도의 효율성을 높이고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대법원의 부담 경감과 하급심의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사나 변호사 경력자들 중에서 법관을 임용하는 미국식 제도를 부분적으로 도입했고 여러 해 전부터 이미 시행해 오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 제도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고 한다.

문제는 이 제도가 성공하리라는 전망이 별로 밝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 법관들은 엄청난 사건 부담으로 고생하면서도 걸핏하면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왔다. 법관들은 자긍심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해 경력을 쌓은 유능한 변호사가 경제적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법관이 되겠다고 나서겠는가. 이것은 기우가 아니다. 이제까지 경력 법조인의 법관 임용 시행에서도 이런 문제점이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제도를 손질할 때는 신중해야 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법관들은 왜 수시로 법원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회광반조(廻光返照)해야 한다. 하늘을 날 생각을 버리고 뿌리를 땅에 깊이 박고 자세를 반듯이 하여 사건의 심판에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권력을 가진 심판자의 입장이라고 오만해서는 안 된다. 법원에는 법과는 사뭇 달리 형성된 실무관행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법관은 입법자가 아니다. 겸허한 자세로 법을 성실히 따라야 한다. 개인적인 이념이나 소신을 사건에 투영해서는 안 된다. 재판은 법관의 개인적인 소신을 피력하는 도구가 아니다.

사마광(司馬光)의 간원제명기(諫院題名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뒷날 사람들이 장차 그 이름을 낱낱이 손가락질하며 논할 것이다. 누구는 충성했다, 누구는 속였다, 누구는 곧았다, 누구는 굽었다(某也忠, 某也詐, 某也直, 某也曲).”

이 가히 두렵지 아니한가.

호문혁 전 서울대 법과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