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미국 공화당과 조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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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공화당은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힘을 합쳐 1854년 결성했다. 2년후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면서 전국 정당으로 발돋움 했고 1860년에는 링컨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최초로 정권을 잡았다.

남북전쟁(1861~65년)을 계기로 미국이 산업화를 위한 내부 정비를 마치면서 공화당은 승승장구했다. 동부의 공업지대와 날로 확대되던 서부 농업지대 주민의 지지를 업고 20세기 초까지 미국 자본주의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870년대부터 1929년 대공황을 맞을 때까지 공화당의 라이벌 민주당은 단 2명의 대통령을 배출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기울어가던 조선왕조의 대미(對美) 외교도 거의 공화당 정권을 상대로 이뤄졌다.

공화당 그랜트 대통령 시절이던 1871년(고종 8년)에 미국은 6척의 함선을 동원해 강화해협에 들이닥쳤다. 유명한 신미양요다.

승정원 일기에는 당시 고종이 신하 김병학(金炳學)과 나눈 대화록이 실려 있다.

김병학이 "미리견(彌利堅.미국)은 단지 부락들로 구성돼 있는데 중간에 화성돈(華盛頓.워싱턴)이 있으며 해외 오랑캐들과 서로 통상을 하고 있다" 고 보고하자 고종은 "그럼 해적(海浪賊)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라고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공화당 정권과 '도둑자본가(robber baron)' 들이 결탁해 차츰 패권주의 국가로 변신하던 19세기 후반의 미국에 대해 안타깝게도 조선은 너무 무지했던 것이다.

나름대로 애를 썼지만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대세를 거스르기엔 안목과 실력 양면에서 역부족이었다.

어쨌든 조선은 1882년 미국과 국교를 맺었다. 역시 공화당 정권(아서 대통령)때였다. 이듬해엔 조선 최초의 대미 사절단이 파견돼 '미국 임금' 도 알현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이미 조선편이 아니었다. 미국은 루스벨트 대통령(공화당) 때인 1905년에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을 함으로써 사실상 조선을 일본에 넘기고 말았다.

나흘간 열띠게 진행된 미 공화당 전당대회가 오늘 막을 내린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이번 37차 전당대회는 한반도, 특히 북한에 대해 유례없이 강경한 정강.정책을 채택했다.

격동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가 만의 하나라도 1백수십년 전 같은 우물안 개구리 신세에 빠지지 않도록 냉정히 살필 때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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