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세상보기] '북괴'여 잘 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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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괴는 북한괴뢰의 준말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북괴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라는 뜻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차마 상종하지 못할 괴물이었다.

모든 악의 집합소인 '북괴' 라는 말을 발음할 때는 어금니를 꽉 물고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뒤따라야 했다.

북괴는 머리에 뿔이 달렸고 입술에 붉은 피칠을 한 못된 짐승이었으니까. 지금도 군대 막사의 벽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무찌르자 북괴군, 쳐부수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은 그래서 신성한 구호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 북괴라는 말이 북한이라는 말로 슬그머니 변신한 것은 냉전체제가 무너진 이후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서 '북괴' 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다.

스스로 우익 애국인사임을 목청 높여 외치는 인사들의 입은 여전히 그 말을 애용하고 있고,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반공웅변대회에서도 '북괴' 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곤 한다.

이제 그 '북괴' 와 완전하게 결별을 고할 때가 왔다. 북괴라는 말은 사어(死語)가 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평양의 순안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이 말은 운명을 다했다고 보아야 한다. 잊혀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트랩에서 내려오기 직전 감회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약간 돌리고 잠깐동안 북녘의 산하를 바라보았다.

반목과 증오를 화해와 협력으로 바꾸기 위해 나선 첫걸음이었으니 그 순간의 표정 속에는 한국 현대사가 압축파일로 저장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대통령은 또 보았을 것이다. 예를 갖추기 위해 공항에 도열해 있는 한 무리의 군인들을. 그들은 바로 무찔러야 할 북괴군이 아니라 손을 잡아야 할 인민군이었다.

그런데 '북괴' 가 있던 자리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들어섰다고 해서 세상이 하루아침에 바뀐 것은 아니다.

나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며칠 동안 텔레비전 앞에서 박수를 치면서도 아직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보안법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대통령과 수행원, 그리고 기자들이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왔으니 그것은 잠입.탈출죄다.

오찬과 만찬에 참석하여 반국가단체의 수괴들과 밥을 먹으며 그 장면을 언론을 통해 보여주었으니 그것은 국가보안법상 회합.통신의 혐의가 충분하다.

반국가단체의 요리사들이 만든 평양온면이 아주 맛있다고 한 점, 평양거리가 깨끗하다고 칭찬한 점은 적을 찬양.고무한 게 분명하다.

남한의 문배주를 선물로 주고 반국가단체의 들쭉술을 받은 것은 금품수수죄다.

그리고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야 할 반국가단체의 수괴와 대통령이 수차례 손을 맞잡은 것을 두고 언론이 역사적 사건이라고 대서특필한 죄도 크다.

이에 부화뇌동하여 들뜬 국민들, 특히 6.25 전범자의 아들 김정일을 김정일 위원장이라고 부르며, 심지어 '멋있는 사나이' 로 치켜세운 사람들의 죄도 일일이 물어야 한다."

여지껏 냉전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수구세력들도 그렇게 주장하고 싶을 것이다.

그들은 '북괴' 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를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우길지도 모를 일이다.

국회에서 이 법의 개폐 논의가 요즈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 이러다가는 또 어느 구석에서 우익이여, 총궐기하라면서 국가보안법 수호 결의대회 같은 것이 열리지는 않을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미 용도 폐기된 '북괴' 라는 말이 다시 회생하지는 않을지…. 그 이전에 내 머리 속에 입력된 무서운 '북괴' 를 떠나보내야겠다.

북괴여, 잘 가라.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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