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달라진 미군 인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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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한 미군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동북아 세력 균형을 위한 조정자로서 주한 미군의 가치를 새롭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6.25 이후 줄곧 미국을 제1의 적으로 규정, 주한 미군 철수를 최우선으로 내세웠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시도한 1990년대 들어서야 주한 미군에 대한 시각의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고(故)김일성 주석은 94년 재미 언론인 문명자(文明子)씨와의 인터뷰에서 "남북이 10만명 이하로 무력을 축소한 뒤 자체방어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미군 주둔을 용인할 수도 있다" 고 했다.

"평화체제하의 주한 미군은 북조선의 남침 방지 역할뿐 아니라 남조선의 북침도 방지하는 한반도 전체의 안보 보장자 역할을 할 수 있다" (姜錫柱 외무성 제1부상.94년 제네바 협상 때 발언), "북.미 양측이 평화협정을 모색하는 동안 미군이 한반도에서 평화유지군으로 활동하는 데 반대하지 않는다" (李鍾革 아태평화위 부위원장.96년 4월 조지아대학 학술회의)는 발언도 나왔다.

이같은 언급은 '군대 감축' '북.미 평화협정 체결(평화체제)이후' 등 남측이 수용 불가능한 상황을 전제로 해 북측의 통미봉남(通美封南)협상 전술 측면이 엿보였다.

그러나 "주한 미군이 비상 상황의 조정자 역할도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 는 내용의 이번 金위원장 발언은 현 주한 미군 기능에 대한 전향적 시각이란 점에서 기존의 언급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한반도의 안보 질서를 결정적으로 바꿀 만한 혁명적 인식 변화" 라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다.

박재규(朴在圭)통일부장관이 "정상회담에서 주한 미군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데 이해를 넓혔다" 고도 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남북 정상회담 이후 이같은 金위원장의 발언을 공개하지는 못한 채 "북한도 주한 미군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는 말을 계속해왔다.

金대통령은 金위원장을 설득하면서 유럽 주둔 미군의 '안보 균형자'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련 붕괴 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그대로 남아 유럽의 안정을 이루듯 한반도 긴장완화, 동북아 세력 균형을 위해서도 미군 주둔은 필요하다" 는 요지였다.

코소보 사태에서 보듯 발칸.독립국가연합(CIS)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이 지역에서 강력한 미군이 갖는 평화유지 기능의 실상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한 외교소식통은 "金위원장은 현재의 불안정한 정전협정 상태에서 미군의 주둔이 오히려 한반도 전쟁 발발을 억제할 수 있다는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고 분석했다.

이에 더해 金위원장이 일본의 군사 대국화에 대한 주한 미군의 견제 역할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최훈.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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