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역사의 기로에 선 한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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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숨가쁘게 변동하고 있다. 변동의 폭도 그렇지만 속도감도 상당하다. 실로 거대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가 발표된 후, 주변 열강들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발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5월 말 베이징(北京)에서는 김정일-장쩌민의 회담이 있었고, 곧 이어 도쿄(東京)에서 한.미, 한.일 정상회담이 뒤를 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간 동북아 문제에서 소외됐다고 불평해 왔던 러시아도 7월 예정의 푸틴 대통령의 극동순방을 발표함으로써 이번에는 몫을 놓치지 않겠다고 단단히 의욕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의 장래와 관련해 열강들간 이해득실의 계산법이 뭔가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남북한을 내세운 편가르기의 전열 재정비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 열강 모두 남북한 양측에 대한 교차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시작한 것 같다. 바야흐로 대결과 견제의 복합적 이중주가 한반도를 둘러싸고 연주되려 하고 있다.

한반도 문제는 두 개의 축에 의해 정치적 좌표가 결정된다. 하나는 국제적 축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 내부의 축이다. 최근까지 한반도 문제의 방향은 주로 국제적 축이 중심이 돼 결정돼 왔다. 90년대 이래 북.미 협상, 4자회담, 한.미.일 공조외교 등 국제적 성격을 지닌 현상들이 두드러진다. 반면 남북한 정상회담은 민족 내부적 영역에 속한다. 사실 지난 한 세기가 넘는 동북아의 역사 지도를 살펴보더라도 한반도 운명은 국제적 축의 영향력이 훨씬 강하게 작용하면서 결정돼왔다. 이에 따라 민족 내부의 자율적 공간은 그만큼 축소돼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한반도에는 왜 국제적 영향력이 이처럼 강하게 작동했던가? 한반도 상황은 그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동북아 국제질서의 방향타 같은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주변 열강들간 권력 게임의 명암이 뚜렷하게 투사돼 왔으며, 한반도는 그들간 전략게임의 결과를 온 몸으로 받으며 역사의 길을 걸어 왔다.

1백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첨예한 국제적 대립구도를 생각해보라. 19세기 후반 세계적 차원의 영.러 대립구도와 청.일간 무력대결이 중첩돼 나타났던 곳이 한반도였다. 한반도의 20세기는 영국과 결합한 일본과 러시아간 대립구도가 격화되는 가운데 시작됐다. 그리고 러.일전쟁과 일본의 식민지화로 한반도의 역사는 이어졌다. 광복 이후 냉전의 양편 가르기 구도가 세계적 영역에서 형성돼 갈 때 그 버거운 운명은 한반도를 비켜가지 않았다.

남북한 분단은 남방 삼각관계와 북방 삼각관계간 양극 대립의 최전선이었고, 한반도는 냉전의 생생한 체험장이 됐다. 사실 그동안 남북한을 내세운 대립적 균형상태는 열강들의 공통된 이해관계이기도 했다. 20세기 초 열강들의 한반도 문제 해법이 일국지배를 통한 안정의 추구였다면, 냉전기의 해법은 분단구조의 지속을 통한 적대적 균형과 안정의 유지였다.

이제 이 방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적대적 관계에 서서히 해빙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면서 열강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한반도 문제의 국제적 축과 민족 내부의 축이 동시에 작동하기 시작했다. 민족 내부 축의 성패는 결국 남북한 당사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이 과정은 상당한 난관을 겪으면서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 문제의 민족 내부적 영역의 확대는 한반도의 장래가 전적으로 타율화의 방식 속에 진행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피할 수 없는, 피해서도 안되는 선택이다.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큰 것도 그런 이유다. 국제정세는 이제 곧 북.미 수교, 북.일 수교의 수순으로 숨가쁘게 진행될 것이다.

이 시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반도를 역사적 공간 속에서 재조명하면서 열강들과의 관계에서 전략적이고 균형적 사고로 한반도의 장래를 구상하는 일이다. 역사의 오류나 비극은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반드시 재현된다. 지금은 변화에 대한 희망과 타율에 대한 우려가 근심스럽게 공존하는 시대다.

김기정<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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