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서 200년 전 어물전 자리 발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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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대로변 피맛골 재개발 부지에서 조선시대 시전 행랑 어물전 자리가 발굴됐다. 교보빌딩 뒤편, 아직도 영업 중인 ‘열차집’ ‘대림집’을 골목 하나 사이에 둔 바로 옆자리다. 한울문화재연구원(원장 김홍식)은 7일 서울 종로 청진2, 3지구 도시환경정비지구 내 유적 발굴조사 제1차 지도위원회를 열고 발굴 결과를 공개했다. 과거 조선 상권의 중심지였던 시전의 실체가 일부 드러난 것이다.

①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뒤편 피맛골 재개발 현장 지하에서 드러난 어물전 유적.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 반짜리 집터가 일렬로 줄지어 있다.
② 1920년대 피맛골 주변 종로 대로변의 모습. [한울문화재연구원 제공]

일단 18세기까지 ‘어물전’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는 청진동 19번지와 20번지에서는 각 정면 6칸, 측면 1.5칸, 정면 3칸, 측면 3칸의 시전 행랑 모습이 노출됐다. 한 칸은 가로 약 2m, 세로 약 3.6m 규모. 바닥에는 구들장과 고래 등 온돌이 설치됐다. 김홍식 한울문화재연구원장은 “상점 뒤 복도 쪽에 부엌 등의 시설을 설치하고 정면에선 손님을 맞았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나란히 있던 두 행랑의 벽을 뚫어 연결시키는 등 장사가 잘 된 상점이 옆 가게까지 인수해 확장한 흔적도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이들 건물지에는 공히 화재로 붉게 탄 흙이 드러났다. 조선시대의 유적 중 불에 탄 부분은 흔히 16세기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곳에선 공교롭게도 16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다양한 도자기 파편이 출토됐다.

나선화 전 문화재위원은 “하나의 문화층에서 16~17세기의 도자기가 모두 출토된 것으로 볼 때 16세기부터 건물이 사용되다가 17세기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가게와 가게 사이는 잔잔한 돌멩이를 쌓아 경계를 구분했다. 김 원장은 “임진왜란 이전에는 국가에서 시전을 지으며 좋은 석재를 들여왔지만 이후 점차 돌이 작아진다”며 “석재의 상태로 보아 임란 이후 상인들이 건물을 새로 지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지도위원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한여름엔 어떻게 생선을 저장했나. 물탱크나 얼음창고는 없었나.” “상인들은 상점에서 숙식했을까, 출퇴근을 했을까.” 기록에 없어 전문가도 모르고, 유적만이 말해주는 한양 시민의 삶이다. 그러나 땅을 더 파보기 전에는 그 답을 알 수 없다. 조유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은 “개발을 전제로 더 발굴할 것인지, 보존해 후대에 넘길 것인지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시전 행랑(市廛 行廊)=조선은 도시개발의 하나로 상가 점포인 시전 행랑을 설치했다. 태종 12년(1412) 종로 1가~창덕궁 입구, 1414년 동대문·숭례문에 이르는 행랑을 짓고 종로 네거리에는 육의전(국가 수요품을 독점 조달한 상점)을 설치했다. 시전과 육의전은 국역을 부담하고 공랑세를 납부하는 대가로 난전(사설 상점)을 단속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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