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시론

기로에 선 북한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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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북한은 이 시점에 무슨 까닭으로 충격적인 화폐개혁을 실시했을까. 무엇보다도 국가 통제체제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감지된다. 북한은 2002년 7·1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부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임금과 물가를 현실에 맞춰 크게 올리고 통화량을 늘려 나갔다. 그러나 물자공급이 원활치 않자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왔다. 7년 전에 비해 물가는 30배 이상 치솟아 근로자 평균 월급 3000원으로 쌀 2㎏도 못 사는 상황에 이르렀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중앙당국의 통제를 벗어난 개인주의적 시장화 흐름이 확산됐다. 주민들은 개인 장사나 부업을 통해 돈을 벌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돈만 주면 모든 게 다 된다’는 인식도 퍼지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돈벌이 수완이 뛰어난 신흥 자본가들은 권력기관을 끼고 엄청난 부를 축적해 장롱 속에 보관해 왔다. 한마디로 ‘화폐 숭배주의’가 판치게 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비롯한 수뇌부는 이런 상황에 위기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 더 이상 묵과하다가는 주민들에게 공언한 ‘2012년 강성대국 건설’도 공염불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 확실하다. 화폐개혁이라는 극약처방은 이런 위기의식의 산물이다.

이번 조치를 계기로 북한은 국영상점을 통한 공급을 늘리는 등 민심을 잡기 위한 후속조치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내부적으로 상당한 준비를 거쳐 화폐개혁이란 메가톤급 카드를 던진 만큼 국가계획경제를 되살리려는 노력도 속속 등장할 것이다. 중앙은행 조성현 책임부원이 조선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비정상적 통화팽창 현상을 근절해버릴 물질적 토대가 마련됐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동시에 빈부격차로 위화감을 부른 일부 특권·부유층을 겨냥한 조치를 통해 그동안 불만이 컸던 빈곤층 주민을 다독이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화폐개혁은 일시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이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시장 질서를 뒤흔든 무리한 국가통제가 문제다. 국가경제와 화폐제도에 대한 불신감은 회복불능에 빠졌다. 개인장사 등에 나서 북한 돈을 쥐고 있던 상당수 주민의 원망을 진정시키지 못하면 북한당국은 곤경에 빠져들 수 있다. ‘시장경제의 맛’을 본 북한 주민들이 제한적이나마 집단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를 물리적 강제력으로 억누르다가는 사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진정으로 경제에 활력이 돌게 하기를 바란다면 이제라도 근본적 정책 변화를 선택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지금 북한 경제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북한 정권이 선택할 길은 결국 ‘우리식 사회주의’의 멍에를 던져 버리고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는 길뿐이다.

조봉현 기업은행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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