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색 자원봉사 - 궁궐지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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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4월의 햇살이 비치는 토요일,햇살보다 더 환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덕수궁 중화전 앞에 모였다.20대 여대생부터 40∼50대 주부,70대 할아버지.세대는 달랐지만 다들 '워서 남 주자'고 모인'우리 궁궐 지킴이'들이다.

"신문에서 '제2기 우리 궁궐지킴이' 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곧 전화를 걸고 찾아갔지."

올해로 70세가 된 어윤화씨. 서울시청에서 건설분야 일을 보면서 고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던 어씨는 정년퇴직 후 민간회사의 임원으로 지내다 얼마전 은퇴했다.

"평소 혼자서도 문화재 답사를 자주 다니는 편이야. 그런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서울 시내의 고궁 안내문만 해도 너무 어렵더라고. 시간도 있고 뭔가 보람있는 일을 찾던 차에 이런 좋은 프로그램을 만나게 된 거지." 어씨의 말이다.

궁궐지킴이가 첫발을 뗀 것은 지난해 9월.

"궁궐이란 소중한 문화자원이 너무 활용이 안 되고 있더라고요. 궁궐을 친근하고 가깝게 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던 차에 정부의 '민간단체 사업 공모' 가 있어 궁궐지킴이 프로그램을 제출했어요." 겨레문화답사연합 강임산 사무국장의 얘기. 이 프로그램이 채택돼 1천만원의 지원금을 받았다.요긴한 종잣돈이었다.

모집공고를 보고 1차로 선발한 사람이 80여명. 궁궐을 자유로 드나드는 것 외엔 아무 혜택이 없지만 호응이 컸다.

두 달 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66명. 제1기 궁궐지킴이들이다.

이들 중 49명이 6개월간의 의무봉사기간을 마치고 다시 2기에 합류했다.

이번에 76명을 새로 선발, 4월부터 자원봉사에 나선 2기는 모두 1백25명으로 불어났다.

"처음에는 섭섭한 일도 있었지요. 애써 다가가 안내해드리겠다면 '다 알아요' 하면서 퉁명스레 받기도 하구요." 1기생인 전업주부 여인애(47)씨. "하지만 요즘은 너무 즐거워요. 안내를 부탁하는 분들도 많고, 열심히 묻는 초.중.고생들에게 성의껏 대답해주면 '고맙습니다' 고 인사할 때마다 이 일을 선택하길 정말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여씨는 2기에도 합류했다.

궁궐지킴이들이 그간 안내한 사람들은 1만명을 넘어섰다.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이지만 외국인도 1백20여명이나 있다.

궁궐지킴이 중에는 은퇴했거나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운 주부들이 많지만 새내기들도 적잖다.

"자원봉사를 원했는데 기왕이면 공부도 하면서 제가 가진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거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지원했어요. " 오사라(21.서일전문대 민족문화과2)양은 종묘를 자원했다.

'조선왕조의 정신이 가장 잘 깃들인 곳' 이란 생각에서다.

궁궐지킴이가 되려면 두달간의 교육을 받는다. 점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배우고 싶었던 것이어서 모두 열심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는다.

여인애씨는 올해 방송통신대 중문학과에 등록했다. 내친 김에 부쩍 늘어난 중국관광객들에게도 설명을 해주고 싶어서다.

일본어가 능숙한 어윤화씨는 요즘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설명을 하기엔 부족하다는 생각에서다.

궁궐지킴이 활동의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재정문제. 입품.다리품만 아니라 교통비.점심값까지 모두 궁궐지킴이들 스스로 해결하는 자원봉사지만 조직을 꾸려가자면 돈 들어가는 구석이 수월찮다.

발족 때는 정부지원금이 있었지만 그것도 한 번으로 끝. 겨레문화답사연합의 강국장은 "회원들의 후원금과 답사여행 수익금으로 충당할 요량이지만 아직은 부족해 2기 발족 때는 상근직원 4명이 1백50만원씩을 추렴해 메우기도 했다" 고 털어놨다.

하지만 큰 걱정은 않는다.

시민운동이 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시간이 지나며 뜻이 모이면 더 크고 더 튼실한 조직으로 자라날 걸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박태욱 기자

궁궐지킴이 되려면…

궁궐지킴이가 되는데 특별한 자격은 없다.

다만 퇴직교사나 은퇴자, 외국어를 하거나 자원봉사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 선발한다. 뽑힌 이들은 2개월간 전문가들로부터 50시간 정도의 교육을 받고 현장답사 경험도 쌓는다.

2번 이상 교육에 참여치 않으면 탈락할 정도로 교육관리가 엄격하다. 교육을 마치면 4개반(경복궁.창경궁.덕수궁.종묘)으로 나뉘어 배치된다.

지킴이들은 6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2시간 정도 안내나 보호활동을 한다.

주중에도 초.중.고교를 대상으로 파견봉사를 하는데 이는 선택사항. 본인이 원하면 6개월 의무봉사기간이 끝난 뒤에도 계속 지킴이 활동을 할 수 있다.

다음번(3기)지킴이 모집은 6월말께 있을 예정. 될 수 있으면 외국어가 가능한 사람을 선발할 계획이다. 고궁을 무상출입하는 것 외에 물질적 혜택은 전혀 없다.

02-708-4206, 747-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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