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달구는 정치연극 두편… 선거판 신랄하게 조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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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대학로 연극무대에 두 명의 '돈키호테' 가 활개치고 있다.

현실 감각 없이 이상만을 좇는다는 뜻에서다. 소신을 굽힘 없이 밀고 나가 아름답게 보이나 세상과 전혀 어울리지 못해 애처롭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상황을 다뤄 갈수록 꼬여가는 총선 정국에 주는 시사성은 크다.

주인공은 연극 '기호 0번 대한민국 김철식' (소극장 아리랑.4월 30일까지.02-741-5332)과 '돼지비계' (대학로극장.5월 14일까지.02-764-6052)에서 나오는 김철식과 비계다.

각각 지난 1일과 15일에 막을 올린 이후 객석 점유율 70~80%의 양호한 기록을 올리며 모처럼 대학로를 달구고 있다.

선거판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마음껏 조롱해 답답한 현실정치에 대한 속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김철식' (최일남 원작.방은미 연출)에선 부모의 뜻을 어겨가며 힙합댄스에 푹 빠진 여학생 해리와 한국정치를 개선하겠다며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세 차례나 낙선한 그의 작은 할아버지 김철식 얘기가 이중구조를 이룬다.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꿈을 잃지 않는 삶을 높게 평가한다.

특히 김철식의 캐릭터가 흥미롭다.

그는 "한 마리 고독한 늑대처럼 나의 길을 갈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 목숨을 바쳤다" 는 말을 반복하는 낭만적 민족주의자. 부친이 사망했을 때도 눈물을 흘리지 않으나 여운형과 김구의 영정 앞에서는 대성통곡한다,

그는 결혼도 포기하며 혈혈단신으로 '썩은 정치' 에 대항한다.

형수가 맞선을 주선하자 상대 여성에게 "이승만 정권을 삼단논법으로 설명하라" 고 딴청을 부리거나, 공탁금을 마련하려고 길거리 약장수를 마다하지 않는 장면에선 웃음이 절로 터진다.

김철식 역의 박철민이 쉽게 잊을 수 없는 능청스런 코믹 연기를 펼친다.

연출자 방은미는 "평소 선거에 무관심했는데 이번 공연을 보고 4.13 총선에 꼭 참여하겠다는 관객이 많다" 고 전한다.

반면 '돼지비계' (오태영 작.박근형 연출)는 다소 비극적이다.

아니 오히려 희극적이다. 정치인의 인질로 전락한 비계의 행보가 비극적인 반면 과연 이런 상황이 있을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는 점에서 희극적이다.

아름답지 않은 제목만큼이나 정치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김철식' 보다 훨씬 냉소적이다.

비계는 머리가 약간 모자란 뒷골목 건달. 감옥을 나와 사회에 복귀한 그는 개과천선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심한다.

"뜨거운 피 민주주의 앞날과 민주주의 무덤에 기꺼이 뿌리겠다" 고 선언한다. 어디선지 많이 들어본 말이다.

그러나 3선에 도전하는 깡패 출신의 국회의원 대촌이 그의 무모한 열정을 철저하게 이용한다.

대촌의 상대진영은 민주주의를 해치는 무리로, 공산당은 무조건 때려잡아야 할 작당이라고 세뇌하고 그의 우직한 충정을 선거판에서 승리의 도구로 동원한다.

문제는 비계다. 대촌은 당선되지만 비계의 집념은 식을 줄 모른다.

그는 선거에서 이겨 희희낙락하는 대촌에게 저항하며 이번엔 판문점에 가서 빨갱이를 소탕하겠다고 나선다.

"오빠는 권력의 하수인이야" 라고 만류하는 여동생마저 총으로 죽이고 판문점으로 향한다.

등장인물의 갈등보다 유형 제시에 초점을 맞춰 우화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지만 추잡한 선거판을 대놓고 꼬집어 호응이 크다.

1980년대 중반만 해도 공연 자체가 어려웠을 것처럼 보인다. 3류 깡패영화를 찍는 것 같은 최정우(대촌)와 남우성(비계)의 연기도 실감난다.

연출가 박근형은 "정치에 대한 신랄한 풍자에서 관객들이 대리만족을 찾는 것 같다" 고 말한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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