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안 시위는 안동지역 기폭제"-안동대 김희곤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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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일제시대 많은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안동지역 3.1운동에서 군중시위의 기폭제가 된 예안시위를 조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안동대 김희곤(金熙坤.46.사학)교수는 28일 "예안시위는 안동지역의 10여 차례 대규모 군중시위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고 밝혔다.

이동봉(李東鳳).이용호(李用鎬)등 예안지역 유지 10여명은 상경해서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안동으로 돌아와 조수인(趙修仁).이운호(李雲鎬)등과 뜻을 합쳐 예안 장날인 3월16일 의거키로 결의했다.

당시 예안면장인 신상면(申相冕)도 참가, 독립선언서를 몰래 등사했으며 거사일자가 장날 다음날인 17일로 연기됐다.

17일 오후 3시30분께 30~40여명의 군중이 면사무소 뒤편 선성산에 올라가 일본이 세운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를 쓰러뜨리고 만세를 부르는 것을 신호로 시장주변에 있던 3개 시위대가 시장을 향해 전진하면서 시위는 시작됐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 참가자 수가 1천5백여명으로 늘어 돌기왓장을 던지며 예안주재소로 밀려 들어갔으며 일경의 강경한 진압으로 40여명이 체포되고 강제해산됐다.

이후 다시 세를 모은 주민들은 22일 오후 7시께 2천여명의 시위군중이 다시 시장 주변에서 2차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경의 발포로 13명이 부상하고 3명이 체포돼 2차시위도 하루만에 실패로 끝났다.

1.2차 시위로 50여명이 체포돼 재판을 받았다.

체포된 이동봉은 일제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2년형을 받은 뒤 이듬해 11월 순직했다.

대규모 군중에 의해 안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예안시위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인근 도산.임동.임하.길안.일직.풍산면 등 다른 지역으로 번진 10여 차례 만세시위의 기폭제가 됐다는 평가다.

안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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