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친일인명사전 그 이후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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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친일 과거사 청산문제는 『친일인명사전』을 계기로 한 고비를 맞았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대립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 과거사 청산 지상주의자들은 해방 이후 숙제를 해냈다며 득의양양 하지만, “세상이 어느 때인데 친일파 시비?”하며 고개를 흔드는 이들이 더 많다. 걱정스러운 건 이 와중에 “우리 역사는 자랑스럽지 못했어.”라는 자기모멸의 심리다. 어떻게 이런 인식의 내전을 한 차원 높여 성찰하고 치유할까? 『세계의 과거사 청산』(푸른역사)을 우선 손에 쥐고 읽어보자. 딱 좋은 참고도서다.

서울대 안병직(서양사)교수 등이 함께 쓴 이 책에 따르면 과거사 청산이란 소란스러운 20세기를 겪어야 했던 모든 나라의 공통 숙제다. 프랑스·스페인·칠레 등도 내전·독재·외세침입을 겪었고, 때문에 과거사 청산이란 부채를 떠안았다. 문제는 잘못된 고정관념이다. 많은 이들이 “프랑스·독일·남아공은 과거청산에 성공했지만, 스페인·러시아·칠레는 실패했다. 한국도 대표적인 실패사례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거청산의 모범답안은 어디에도 없다. 그게 진실이다. 부역자를 모두 솎아내는 싹쓸이 인적 청산에 성공한 곳도 전혀 없다. 성공사례로만 알아온 프랑스도 그렇다.

프랑스가 2차 대전 뒤 나치 부역자 12만 명을 사법처리 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인적 청산은 1951~53년 사면령 이후 바로 흐지부지됐다. 드골 중심의 레지스탕스 운동도 과장된 신화 만들기로 지적된다. “다수의 프랑스인은 숙청작업에 높은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103쪽)

반면 스페인은 싹쓸이 청산의 정반대 길을 선택해 성공한 나라다. 스페인 현대사란 한국과 완전 붕어빵인데, 100만 명이 희생된 동족상잔(내전), 프랑코 독재 36년 체험, 그리고 독재기간에 이룬 경제성장까지 꼭 같다. 하지만 그들은 75년 프랑코 사망 이후 “과거 문제를 들춰내지 않고 넘어감으로써 큰 혼란 없이 민주화를 이룩했다”(292쪽)는 게 이 책의 평가다. 어느 나라가 잘하고, 못한 것일까? 질문 자체가 잘못이다. 프랑스모델·스페인모델 중 정답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스스로 중심 잡고 우리식 청산 모델을 만들어야 하며, 그에 따른 사회적 합의를 구해야 한다. 이때 모든 것을 싹 쓸어내고 새 출발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그건 어설픈 조급주의이자, 과거에 대한 투정이다. 또 역사란 민족정기·정의를 위한 선악의 실험장이 아니지 않던가? 실제로 한국 현대사란 ‘과거사 문제의 종합세트’다. 동족상잔·독재·외세침입을 모두 경험한 무시무시한 체험을 했다.

‘칠레+스페인+프랑스’를 합한 아픔이었고, 이 와중에 자멸해버릴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놀라게도 우리는 이걸 딛고 근대화 혁명에 성공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비(非)서방 140국 중 민주화·경제성장·시민사회를 이룬 것은 우리가 유일하다. 어느 누가 그걸 감히 부정할까? 그렇다면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후 우리 선택은 자명하지 않을까? 소모적인 내출혈을 거듭할 것인가, 과거를 보듬으며 미래를 예비하는 새로운 지평을 확보하는 지혜를 발휘할까?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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