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정치가 뭐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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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총선 공천을 둘러싸고 정치판이 법석이다. 예의나 체면은 팽개친 지 오래거니와 욕설은 기본이고 주먹.발길질도 예사다.

아무리 진흙탕 싸움이지만 적과 동지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으니 참으로 꼴불견이다. 온 국민이 손가락질하는 것도 모르는지 모두 잘났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노라면 "정치가 뭐길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 지경인데도 멀쩡한 유명인사들이 서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공천을 받기 위해 줄서있는 대학 총장과 교수.언론인.법조인.의사.공직자.기업 임원.운동선수.연예인 등은 하나같이 '정치 하기엔 아까운' 면면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정당 문을 기웃거린 경우나 정당의 모시기 대상자나 모두 방송 출연 횟수와 지명도가 당선의 바로미터다.

여야 구별 없이 공천자 발표를 보면서 "아니 저 사람도…" 하는 놀라움과 함께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 한두번이 아니다.

이들은 대부분 신문 동정란이나 TV 프로그램의 단골손님들이다. 전공 분야는 물론이고 각종 오락 프로그램에까지 자주 얼굴을 내밀어 낯익은 얼굴들이다.

카메라 기자들의 우스갯소리인 '찍을 때는 안보이다가 인화된 사진 속에는 나오는' 정도로 매스컴을 선호했다는 게 공통점이다.

평소 방송에 나와 바른 말을 잘해 좋아하던 교수가 공천 줄서기 하는 모습에 요즈음엔 TV를 볼 때마다 '혹시 저 사람도 다음번 선거에…' 하고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다.

매스컴이 정계 진출의 등용문이 된 게 어제 오늘도 아니고 법적으로 전혀 문제될 게 없긴 하지만 매스컴 스타들이 당선 후 함량미달로 드러나고 기대에 어긋나기 일쑤인데도 선거가 거듭될수록 계속 늘어가는 것은 문제다.

1960년대 말~70년대 초 반독재 투쟁과 민주화를 외치며 대학 학생회장에 출마하려는 제자에게 교수들은 "중앙정보부에 취직하려고 그러느냐" 는 말로 말리곤 했다.

학생회 간부 중 일부가 졸업 후 정보부 직원이 돼 학교를 드나드는 데 대한 비아냥이었던 것이다. 취직이 힘든 때이긴 했지만 정보부원이 된 선배를 보며 얼마나 기만감(欺瞞感)을 느꼈는지 모른다.

4년에 한번씩 총선 공천 때마다 비슷한 느낌을 되풀이 맛보고 있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후 변신하는 게 아닌가 눈여겨 보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아닐성 싶다. 모두들 염불보다 잿밥에 더 마음이 있었다는 얘기다.

이들이 사전에 "나는 정치를 하겠소" 하고 솔직하게 밝혔어도 그같은 인기스타가 됐을까. 속셈을 숨긴 채 신문.방송에 나와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일삼아왔다면 이중인격자다.

정치적 야심을 이루기 위해 매스컴을 이용했든 유명인이 되다보니 정치에 뜻을 두게 됐든 결과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한다.

결국 이들은 정치 입문을 노리고 매명(賣名)을 위해 그동안 '위장취업' 한 것과 마찬가지다. 정치인이 되기 위해 매스컴을 통해 몸값 올리기.얼굴 알리기를 했다면 사전 선거운동을 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70~80년대 노동 현장의 위장취업이야 군사정권 아래서 노동운동.민주화 투쟁의 한 방법이었지만 개인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한 위장취업은 유권자에 대한 기만.배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의미에서 웨이터로 유명한 서상록(徐相祿.63)전 삼미그룹 부회장의 공천 거절은 신선하다. 몇 년 전 그가 나비 넥타이를 매고 견습 웨이터를 시작하며 매스컴의 각광을 받을 때 필자는 죄스럽게도 속뜻을 의심했었다.

당시 취재기자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그는 "저 같은 사람이 정치하면 나라가 망하지요" 라고 부인했지만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다. 자기 발로 찾아간 것도 아니고 집권당에서 알아서 공천을 주겠다는 것을 마다하기가 쉬운 일인가.

"나는 정치할 나이가 지났다. 비즈니스맨이 한달에 5백만원 벌어서 3천만원 써야 하는 일을 왜 하겠느냐" 는 그의 말은 여러가지로 음미해 볼 만하다.

이제 정치인 물갈이는 대세다. 어떤 사람으로 갈아치우느냐가 초점이다. 제발 검증 안된 인기 위주의 1회용 매스컴 스타, 약삭빠른 위장취업자가 득시글거리는 국회는 안됐으면 좋겠다. 아울러 4년 뒤 다시 씁쓸한 기만감을 맛보지 않기를 기대한다.

권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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