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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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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빛바랜 한 장의 사진이 대하소설보다 풍부한 사연과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경우가 더러 있다. 1949년 9월 27일 오전 도쿄의 주일 미 대사관저에서 미군 상사가 촬영한 이 사진도 마찬가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로 진주해 온 더글러스 맥아더와 ‘신’에서 ‘인간’으로 강등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첫 만남을 기록한 사진이다.

부동자세를 취한 사진 속의 일왕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일왕을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연합국 내에 비등하던 무렵 생살여탈권을 쥔 맥아더와 처음 만났으니, 정녕 그가 신이 아닌 이상 왜 아니 그랬겠는가. 일왕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맥아더는 체격만으로도 일왕을 압도하고 남았다. 노타이에 평상복 차림으로 호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짝다리 자세로 서 있는 맥아더의 자세는 또 어떤가. 승자의 당당함과 패자의 굴욕이 고스란히 묻어 나지 않는가. 아마 일왕은 그때까지 사진을 찍어 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자세로 세 컷을 찍었는데 첫 컷은 일왕이 눈을 감았고, 둘째 컷에선 일왕이 입을 벌렸다.

일본 언론들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처음엔 사진 게재를 거부했지만 연합군 사령부(GHQ)에 두 손 들 수밖에 없었다. 불과 한 달 보름 전까지 살아있는 신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일왕의 한없이 왜소한 모습을 목도한 일본 국민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충격과 함께 다가온 것은 패전에 대한 뼈아픈 자각과 “신 위에 맥아더가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그건 바로 맥아더 사령부가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또 한 장의 사진이 세계 각국의 언론 매체를 장식했다. 이번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히로히토의 아들 아키히토(明仁) 일왕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 인사하는 장면이다. 맥아더와 히로히토의 사진에 충격을 받았던 일본 국민이 이번엔 신선한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오바마는 이 사진 한 장으로 일본인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정작 미국에서는 “당당해야 할 미국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이라며 외교 프로토콜에 부합하느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 따지고 들면 한없이 복잡하고 정답이 없는 게 외교 프로토콜이다. 과공비례를 탓하는 것도 일리가 없진 않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샀느냐 그러지 못했느냐의 잣대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