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회복 뒤엔 저성장 그림자가 뒤따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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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호 30면

미국·유럽·중국·일본 등이 아낌없이 돈을 풀었다.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대공황 이후 최대 위기인데도 빠른 속도로 경제가 회복하고 있다. 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이 이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제 비(위기)가 그치고 난 뒤가 아니라 돈의 힘에 의해 갑자기 내리쬐는 햇살(빠른 경기 회복)이 약해진 뒤를 걱정해야 할 때다.

앤서니 볼턴의 글로벌 시장 탐험

단기적인 회복 국면이 지난 뒤 주요 국가의 경제성장률은 위기 직전보다 낮을 수밖에 없을 듯하다. 이는 선진시장 참여자들이 자산을 배분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최근 6개월 동안의 경기 회복을 되짚어 보기 위해서는 글로벌 경제의 추락 국면을 분석해야 한다. 경기 추락은 소비 쪽보다는 기업 쪽에서 먼저 시작했다.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세계 경영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 재고와 설비 투자를 줄였다. 임직원들을 정리해고했다. 지난해 4분기와 올해 1분기 각종 경제지표가 최악이었던 이유다.

최근 기업 경영자들은 반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낙관적으로 변하면서 재고를 늘리고 정리해고를 줄이고 있다. 경기가 되살아나고 있는 이유다.

금융위기는 깊은 흔적을 남겼다. 소비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들은 부채를 줄여 대차대조표를 건전하게 만드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그만큼 자금 수요가 줄어들었다. 그들이 대출을 꺼리는 바람에 신용 창출이 위기 이전보다 훨씬 덜하다. 여기에다 정부가 경기 부양에 나서면서 채권 발행 등으로 시중 자금을 빨아들여 민간이 투자하거나 소비할 돈이 줄어들었다. 이는 회복 국면이 끝난 뒤 세계 경제가 심상치 않을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처럼 선진국 경제의 성장 여력이 줄어들고 있는 마당에 신흥국들의 놀라운 성장률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내수가 뒷받침된 신흥국은 그런대로 좋을 듯하다. 선진국 성장과 소비가 시원찮을 때 내수가 버텨 주면 어느 정도 성장을 이어 갈 수 있다. 공산품이나 천연자원을 수출해야 하는 신흥국은 그렇지 못할 듯하다. 이들이 선진시장의 성장·수요 감소의 파장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펀드매니저 시절의 경험에 비춰 보면 위기 직전 호황장을 이끌었던 자산이 붕괴 이후 시장을 선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그런데 시장 참여자들은 붕괴 이후 주가가 회복하면 위기 직전 호황 순간 빛을 내뿜던 자산을 다시 사들이는 경향을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석유와 금, 곡물 등 상품이다. 위기 직전 호황인 2006~2007년 상품가격이 급등했다. 최근 주가가 회복하자 투자자들이 기억을 되살려 상품에 베팅하고 나서고 있다.

상품주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세계 경제 성장이 장기 평균치를 웃도는 흐름이 펼쳐지거나 인플레이션이 심하게 일어나야 한다. 지금 세계 경제가 장기 평균치를 웃도는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내가 보기에 현재 인플레이션은 장기적인 위협일 뿐이다. 2~3년 안에 고개를 쳐들고 세계경제를 뒤흔들어 놓지는 않을 듯하다.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 기업들의 설비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가동되지 않고 놀고 있다. 이런 때 수요가 갑자기 늘면 기업은 가격 인상보다는 제품이나 서비스 공급을 늘리는 쪽을 택한다.

중국이 변수이기는 하다. 중국 정부가 올해 상반기 대거 공급한 자금은 기업들의 원자재 구매에 활용됐다. 최근 중국의 대출증가율이 낮아지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쌓아 놓은 원자재를 소모하는 데 치중할 듯하다. 상품 수요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미국·유럽·일본의 성장률이 낮다고 이들 지역 증시에 투자하는 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들 지역의 저금리 정책 때문에 투자자들이 고수익을 좇아 정부 채권이 아니라 주식이나 기업 채권 등에 베팅하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현재 각종 펀드들이 현금을 대량으로 머금고 있다. 이런 점을 들어 나는 주가가 몇 년 동안 오름세를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근 글로벌 증시는 단기적으로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다.

저성장 시대라고 모든 기업이나 업종, 국가가 낮은 성장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투자자는 조금이라도 높게 성장하는 기업이나 업종, 국가를 골라 베팅해야 한다. 잘만 하면 과거 호황 시대보다 더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저성장 시대 조금이라도 높은 성장을 보이는 곳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반적으로 선진시장 투자자들은 전체 자산 15~20%를 신흥시장에 투자하고 있는데, 좀 더 비중을 늘릴 필요가 있다. 그런데 선진 시장 투자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신흥시장 비중을 늘리면 우리는 몇 년 안에 ‘이머징 마켓 버블’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런 가능성에 대비해 안전띠를 당겨 맬 필요가 있다. 안전을 감안하면서 시장의 출렁거림을 즐길 준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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