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베를린 그로부터 1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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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독일통일과 공산주의 붕괴는 마치 예정된 시나리오에 따라 진행된 것 같다는 뉴스위크의 감상(感想)(99년 11월 8일)에 동의한다.

그해 1월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작은 규모로 시작된 자유토론과 민주시위는 전국적인 대규모 집회로 확대되고 10월엔 호네커가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서 축출됐다.

6월엔 폴란드의 자유노조가 공산권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승리하고, 여름에는 헝가리가 동독시민을 위해 오스트리아로 통하는 국경을 개방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벨벳혁명에 성공하고 12월엔 루마니아가 차우셰스쿠를 처형하고 공산당지배를 끝냈다.

그리고 90년 10월 독일통일, 그 다음해 12월 소 연방해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동독에는 39만명의 소련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소련 정치.경제개혁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지만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해체로 연결될 것이라고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뉴욕 타임스가 1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많은 식자(識者)들이 바보처럼 보였다고 논평한 것도 과장이 아니다.

민주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될 때 호네커는 고르바초프가 소련군에 동원령을 내려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서방세계의 많은 전문가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흐루시초프도 브레즈네프도 아니었다. 그는 1988년 19차 소련공산당대회에서 이미 동유럽국가 인민에게 자신들의 사회제도와 생활방식.정치제도를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선언해놓고 있었다. 그것은 동유럽에 대한 소련의 지배권(브레즈네프 독트린)의 폐기선언이었다.

미국과 서유럽은 소련.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붕괴를 보고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인 승리라고 열광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 같은 미국의 젊은 역사가는 이념간의 경쟁으로서의 역사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미국인들의 기분에 맞는 그런 진단은 널리 유행을 탔다.

실제로 세계는 미.소 양극체제에서 미국의 일극(單極)체제로 이행하는 것 같이 보였고, 1991년 걸프전의 '대승' 은 소련이라는 존재의 소멸과 유일한 슈퍼 파워 미국의 압도적인 존재를 확인하는 계기로 생각됐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역사는 끝난 게 아니었다. 발칸반도에서는 역사가 새로운 장(章)을 열고 있었다. 냉전의 무게에 눌려있던 민족갈등.종족갈등이 한꺼번에 분출했다.

거기에 종교갈등이 겹쳤다. 유일한 슈퍼 파워 미국도 보스니아.코소보.동티모르사태 하나 단독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인권이 유린되는 주권국가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을 주장하면서도 러시아의 체첸과 중국의 티베트문제에 내는 소리는 들릴락 말락 하다.

중국.베트남.쿠바.북한의 사회주의체제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전의 상태로 남아있다. 호떡집 간판을 걸고 햄버거를 파는 것이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모델이라고 해도 사회주의는 사회주의요, 중국의 일당지배 체제는 확고하다.

우리는 냉면집 간판을 걸고 스파게티를 팔더라도 북한이 중국만큼만이라도 냉전 이후 세계의 환경에 맞춰 변해주길 바랄 뿐이다.

냉전 이후의 아시아와 중남미를 강타한 금융위기는 또 어떤가. 미.소대립이 사라진 세계에서 후진국과 중진국들은 세계화의 이름을 건 투기적인 다국적 '카지노 자본주의' 에 편입되고 있다는 일본의 문명비평가 카라타니 코진(柄谷行人)의 경고는 경청할 만하다.

지혜를 상징하는 미네르바의 부엉새는 저녁 무렵에 날개를 편다. 사건의 종말에 가야 사건의 진상을 알 수 있다는 의미다. 지난 10년을 하루로 치면 99년은 황혼 무렵이다. 여기서 돌아보는 89년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시작이었음을 확인한다.

한반도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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