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기관지에 이승엽 소식 실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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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11일자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에는 한국 프로야구 홈런왕 이승엽 소식이 실렸다. 시즌 54호 홈런에 그쳐 아시아 기록을 세우지 못했다는 단신이었다.

이승엽에 관한 기사는 이달 들어 두번째다.

6일자에는 선동열.이상훈.이종범의 활약으로 주니치 드래건스가 일본 프로야구 센트럴 리그를 제패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 신문에 한국 프로선수의 활약상이 실린 것은 전례없는 일이다.

요즘 재일동포 사회에는 선전지의 틀을 벗고 있는 조선신보가 화제다. '독자가 참가하는 신문으로 달라진다' 던 이 신문사의 4일자 사고(社告)는 빈말이 아니었다. '일본의 환경, 조총련 실정, 신세대 동포의 정서와 요구에 맞게 편집하지 못했다' 는 반성에 따른 것이었다. 매체에 대한 불신으로 취재를 거부당했던 기자의 부끄러운 '고백기' 도 실렸다.

이날 이후 '보통 신문' 으로 거듭나려는 조선신보의 노력은 지면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1면을 도배질해오던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 보도 대신 동포의 생활상을 다룬 취재 기怜?크게 자리잡기 시작했다.

변화의 상징은 김정일(金正日)총비서에 관한 보도다. 항상 1면 톱을 장식했던 그의 동정은 3면으로 밀려났다(10월 11일자). 호칭도 달라졌다. '경애하는' '위대한 영도자' 등의 수식어가 빠지고 단순히 '김정일 총비서' 로 표기되고 있다. 북한을 턱없이 미화하고 한국과 일본을 싸잡아 비난하는 기사도 보이지 않는다.

'동포 발언' 이라는 투고란도 신설했다. 조선신보의 어느 간부는 기자에게 "한국 특파원들의 글도 실을 수 있다" 고 말했다.

'데스크의 눈' 이라는 칼럼도 선보였다. 첫 칼럼 '일본 개각과 북.일 관계' 는 개각을 맞아 북.일 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가슴앓이를 해오던 조총련 동포들의 속내를 내비친 것 같다.

기사에는 취재기자의 이름을 넣어 신뢰성을 높였고 발로 뛴 기사도 자주 눈에 띈다. '불고기 전쟁의 현장' 시리즈는 동포들이 많이 종사하는 불고기 업계의 생존 전략을 깊이있게 다뤘다.

조선신보의 탈바꿈에 대해 조총련계 동포들도 반기고 있다. 이들은 북한식 사회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한국 정세도 있는 그대로 알려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요구해 왔다.

조일수출입상사 박광(朴廣)상무는 "정보량이 많아져 좋다" 며 "지면개편이 부수 확대로 이어질지 관심" 이라고 말했다.

민단계 동포들은 놀랍다는 반응들이다. 배철은(裵哲恩) 민단 선전국장은 "이렇게까지 바뀔 줄은 몰랐다" 며 "민단-조총련의 이질감 해소에도 도움을 줄 것" 이라고 했다.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북한과 이해가 얽힌 큰 사건이 터지고 난 다음의 보도 자세를 지켜봐야 한다" 며 일단 신중한 입장이다. 그러나 조총련계 신문의 변화는 이미 변곡점을 지난 듯한 느낌이다. 지면개편이 밑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동포들의 개혁 요구를 반영한 것인만큼 이를 무시하고 다시 옛날로 되돌아가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도쿄〓오영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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