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나와 다른 생각 이해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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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요즘 우리 또래 사람들의 모임에 가면 느끼게 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가족·친구 간의 모임이든 공식적 회의이든 간에, 서로들 너무도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본다. 오죽하면 ‘모이면 봉숭아학당’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다 있을까. 대화나 협의는 없이 각자 숨 가쁘게 자기의 말만 하고 헤어진다는 것이다. 어려서는, 나이 들면 포용력도 커지고 귀가 부드러워져 남의 이야기를 잘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외려 점점 더 고집과 주장이 강해지고, 의견이 다르면 아예 만나지도 않으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젊은 층이라 해서 꼭 타협적인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악플’이라는 용어를 낳은 소위 네티즌들의 행동양식을 보면 자신과 다른 의견의 수용에 너무 인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들 자기 말만 하고 자기 시각으로만 세상을 본다면 다양성의 존중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을 잃을 수가 있다. 또한 사물의 판단에 있어 공정과 객관을 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운찬 총리 임명동의안에 대해 ‘표결 거부’라는 당론을 거스르고 소신 투표한 한 국회의원의 행보가 화제가 되었었다. 국회의원은 당원이기 전에 국가에 봉사하는 독립된 헌법기관이고, 표결에 참여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당연한 의무라며 홀로 투표를 감행했다고 한다. 소속 당에서야 의당 불만일 테지만, 공천을 의식해 당론에 매인 나머지 소신은 숨기고 활극에 몸 던지는 우울한 코미디의 현실에서, 그의 행보는 앞으로 정치인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정답을 제시하는 듯했다. 요즘 세종시의 추진과 관련해 논의가 분분한 것을 보면, 과연 당시의 국회의원들이 국가 전체의 시각에서 소신대로 표결을 했던 것인지 의문이 든다. 그렇게 했다면 표결에 따라 통과된 법은 당연히 지켜야지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면, 합리적 판단을 접고 여론과 당론에 밀려 표결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소모적 국론분열을 초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 국회의원은, 공직자로서 외제차를 타는 것이 국민정서에 위배된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소신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차인데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국산차를 하나 더 산다면 그것이 낭비이고 가식적이지 않으냐, 또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외제차를 너무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대외용 국산차 타기가 더 문제인 것을 잘 알면서도, 언제부터인지 이러한 소신 발언에 덜컥 겁부터 나곤 한다. 그 발언의 본질은 외면하고 외제차 타는 국회의원이라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어 질타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소심함의 발로에서.

한편 헌법재판소의 야간 집회·시위 제한에 대한 위헌 결정에 대해, 이를 반대하는 측에서는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들면서 법관들이 격렬 시위의 피해를 당해보지 않아 현실을 모른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물론 재판관이 강도나 사기 등 범죄를 당해봐야만 재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피해자의 입장, 국가질서 등 여러 사정을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고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는 모든 재판에 있어 수용할 바가 있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묘해서, 외도하는 남편은 아무 일 없는 듯이 매너 있게 부인을 대하고, 화난 부인은 쌀쌀맞게 남편을 대하면, 자식들이 외려 부인 쪽을 나무라는 분위기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이처럼 재판과정에서도 정서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는 경우가 있다. 많은 소득을 얻고 있던 유망한 사업가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드는 과속차량에 목숨을 잃은 사고가 있었다. 가족이나 회사엔 청천벽력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손해배상 재판이 시작되면 그 끔찍한 사고는 이미 무뎌지고, 사망자의 고소득에 따라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하는 보험회사가 외려 피해자인 것처럼 입장이 뒤바뀌어 버린다. 민사재판에서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는 제외되고, 법관은 손해배상을 구하는 피해자 가족과 손해를 물어줘야 하는 보험회사만 대하다 보니, 고소득의 피해자 측에 양보하라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피해자 측으로서는 억울한 사람을 두 번 죽인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또, 뇌물죄의 경우 보통 뇌물수수는 은밀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뇌물을 주었다는 사람의 말이 거의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은데, 이에 관해 검찰이나 법관들은 때로 “주었으니까 주었다고 하겠지 안 주고도 주었다고 할까” 하는 견해를 제기하곤 한다. 이에 대해 일반 사람들은, 세상에는 안 주고도 주었다고 하는 이도 많은 것이 현실이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봉숭아 학당만 계속된다면, 대화도 없고 합리적인 국정운영이나 현명한 재판도 멀어질 것이다. 좀 더 남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다른 이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려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인내를 필요로 하겠지만.

김영혜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