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5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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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제10장 대박

내키지 않는 동행에 생색을 내비치는 것이 분명한 제안은 물론 깨끗이 거절해야 옳았다. 안면도까지 동행해 보았자, 사사건건 졸졸 따라다니며 남의 비위만 건드릴 위인이 분명했다.

그러나 대뜸 거절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가 박봉환의 도피행각을 소상하게 꿰고 있다는 사실이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깨끗한 탁자 위를 몇 번이나 휴지로 닦아 내고 있는 그에게 동행을 요청하고 말았다.

그는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다방을 나가더니 십분도 못되어 말쑥한 정장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꼴에 밤똥 싸더라고 안면도까지 택시를 대절한답시고 껍죽대다가 한철규에게 면박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엉뚱한 행동까지도 한철규의 씀씀이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다는 것은 알아차릴 만했다. 버스에 올라서도 잽싸게 휴지를 꺼내 한철규가 앉을 자리를 훔쳐 주는 결벽성과 기민성을 보여 주었다.

"박봉환씨가 거래했다는 품목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중국으로 같이 내뺀 윗동서 되는 사람과 합작을 한 모양입디다.

동서는 안면도에서도 소문난 노름꾼이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합작을 했다면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다가 일을 벌였을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억대 거래는 물어 보지 않아도 뻔하겠지요. 중국산 나물이나 콩이나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어 봐도 대답하지 않았겠지만, 그 수화물들이 몽땅 세관에 잡혀서 수배령에 쫓기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배형하고 동업관계는 뒤끝을 깨끗하게 마무리한 후에?" "그 사람이 매사에 원칙 없이 갈팡질팡하는 것도 문제지만, 셈조차 흐립디다. 둘 관계를 청산하자는 말이 났을 때, 내가 선뜻 동의한 것도 주장은 셈이 흐렸기 때문이지요. "

"생판 모르는 남남들끼리 의기투합해서 합작한다는 것도 어렵지만, 그 관계를 원만하게 청산하기는 더욱 어려운 거요. 청산하고 헤어질 때는 셈이 분명해야 서로간에 부담이 남지 않는 것 아니겠소? 안면도까지 동행하자는 것도 그런 문제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오?"

"내가 한선생님께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보십시오. 지금까지 나하고 동업했더라면 큰 이문은 못 봤겠지만, 지금처럼 중국까지 쫓겨다니는 신세는 모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같은 각박한 세상에 굶지 않고 먹고 살면 됐지, 일확천금을 노리다가 몽땅 날리고 신세까지 고단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

"당신 말하는 걸 듣고 있으면, 박봉환이가 도망다니게 된 것이 고소하다는 심보를 가진 것 같은데, 한때는 동고동락하던 동업자를 그렇게 헐뜯기만 해서 되겠소?" "박씨와 동업할 때, 한선생 얘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한선생을 좋게 얘기하는 걸 듣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앙갚음을 하겠다는 심사가 분명했어요. 그런 사이로 알고 있는데, 내가 박씨 말을 좋게 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

"우리 둘 사이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걸 짐작했을수록 배형의 말은 곱게 나와야 되는 것 아니오? 배형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박봉환을 만나서 따끔하게 앙갚음이라도 해 주면 속시원하겠다는 속셈 같은데, 사람이 그렇게 데데하고 싸가지 없이 굴어선 안되는 거요. "

정면으로 한 대 쥐어박힌 배완호는 그제서야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힐끗 일별하자니,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기분 같아서는 버스를 내리고 싶기도 하겠지만, 차는 벌써 안면도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백사장포구에 닿을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줄곧 침묵이 흘렀다. 그 정거장에서 배완호는 대전으로 가는 버스로 곧장 갈아탈 낌새가 역력했다. 속셈을 알아차린 한철규는 그의 뒷덜미를 다소 거칠게 휘어잡았다.

"내 말이 귀에 거슬렸겠지만, 양해하시오. 대전에서 당장 헤어지고 싶었지만, 배형이 한때는 박봉환씨와 동고동락하던 사이라는 것을 알고 동행한 거요. 윤종갑씨를 보시오. 매사에 깐죽거리는 것이 버릇되면 머지않아 이웃과 소원해지는 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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