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교육개혁] 1. 수업의 '틀'을 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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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새 세기, 새 밀레니엄은 지식과 정보가 개인 및 국가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스위스 제네바대의 클라우스 슈바브 교수는 20세기말의 시대적 특징에 대해 "풍요와 빈곤의 경계선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에서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사이로 옮겨 가고 있다" 고 규정했다.

지식과 정보의 시대는 교육이 주도한다.

시대적 패러다임이 바뀌는 이상 교육의 역할이나 방법론의 변화는 필연적이다.

선진국들이 새로운 교육의 실험에 총력전을 펼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교육과 지식의 다음 세기를 향해 그들은 국가의 명운을 걸고 맹렬하게 달려가고 있다.

선진교육의 현장에서는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10회의 현장취재 시리즈로 알아본다.

페루 안데스 산맥의 해발 3천5백m 지점. 5천여m 고봉들에 둘러싸여 움푹해 보이는 고산지대다.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지만 영국 케임브리지대 지질학과 3년생 로라 로빈슨 (21) 양에겐 소중한 교실이다.

고지여서 더욱 또렷했던 별빛이 점차 사그라들고 산양들의 울음소리가 고요를 깨뜨리는 새벽 4시. 동료 2명과 야영텐트 속에서 곯아떨어졌던 로빈슨은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노트북 컴퓨터를 켜고 핸드폰으로 위성전화를 연결한다.

인터넷 화면엔 대서양 건너 지도교수의 사이버 교실이 나타난다.

이날도 탐사과정에서 생긴 의문을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도교수가 밀리는 형국이다.

교수는 "새로운 발견인데…. 다음주 화요일까지 관련자료를 찾아보고 답변해 주겠다" 며 1시간짜리 강의를 마쳤다.

그녀의 올 겨울방학 탐사 지역은 칠레 북부 아타카마 사막.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꼽히는 이곳엘 가기 위해 이미 치밀한 계획을 짜놓았다.

케임브리지대는 세계의 특이지질 지역을 답사하려는 학생들을 위해 인터넷 현장수업이라는 새로운 강의방식을 도입했다.

로라 같은 지질학도들에게 자연현장은 최고의 강의실이자 실험실이다.

선진 각국의 교육현장에선 지금까지 정형으로 여겨오던 '교실수업' '1교실 1교사' 등 전통적 수업방식의 틀이 깨지고 있다.

최대의 교육효과를 찾아 교실을 떠나고, 여러 선생님이 동시강의를 진행한다.

특히 컴퓨터와 통신의 발달 덕택에 전파가 닿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교육현장이고, 언제라도 수업시간이다.

가용자원을 총동원한 '수업파괴' 는 선진국에서는 이제 일상적 현상이다.

"내 강좌에서 살아남는 법 12가지를 알려드립니다. " "LA타임스에 언어학 관련 기사가 게재돼 참고로 보냅니다. 꼭 읽기를. " "리포트 주제를 너무 막연하게 잡은 군의 학점은 엉망으로 나갑니다. 주제는 되도록 좁히세요. "

미국 UCLA대 응용언어학과 재닛 굿윈 (42.여) 교수가 매일 한두차례 학생들에게 띄우는 E - 메일의 일부다.

강의계획이나 숙제.참고도서 등도 모두 여기에 담겨 있다.

질문을 띄우면 교수는 가상공간에서 과외수업까지 해준다.

가상교실에서 군더더기를 소화한 덕분에 굿윈 교수의 수업은 언제나 시작과 동시에 토론과 세미나로 들어가게 된다.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 개설된 대통령학 강좌 - .백악관 수석보좌관을 지낸 로저 포터 교수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대통령들의 정책결정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하면 '외도' 경험이 없는 다른 교수가 옆에서 한마디 거든다.

현실정치와 순수 정치이론 사이에서 불꽃튀는 설전이 전개되기 일쑤다.

학생들은 흥미진진하게 듣다가 때론 이쪽 편으로, 때론 저쪽 편으로 논쟁에 가세한다.

교수들의 말은 최종 결론이 아니다.

언제라도 비판을 받고, 또 이를 반박할 준비가 돼 있다.

미국 최초의 주립대학인 노스 캐롤라이나대. 이곳 생물학과엔 두 명의 교수가 동시강의를 하는 강좌가 6과목, 3명의 교수가 등장하는 과목도 3개나 된다.

세포생물학의 경우 월.수.금요일에는 앨런 영 교수와 새러 그랜트 박사가 단백질 구조와 효소를 가르치고, 화.목요일 수업에는 제이슨 리드 박사가 생물의 피막조직을 강의, 학생들의 이해도를 높인다.

"현대 생명과학은 많은 전문분야들의 종합적 이해가 요구된다" 는 게 학과장인 앨런 존스 교수의 설명이다. 노벨상 후보로 오른 대학자도 새파란 젊은 교수들과 교차수업을 진행하는데 군소리가 없다.

이 강의를 듣는 에이미 패티실 (20) 양은 "한 학기에 네번이나 시험을 봐야 하는 게 고역" 이라면서도 "등록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유일한 강의였다" 고 말했다.

깨지기 시작한 기존의 수업방식. 그 실험이 어디까지 나아갈지 현재로선 가늠키 어렵다.

새 천년을 앞두고 급변하는 시대조류에 발맞추려는 선진 각국들의 교육개혁 노력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교육은 모든 정책의 최중심에 서 있다. '

'낮은 성취는 결코 용납할 수 없다. '

'교육수준의 향상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어떤 집단과도 협력할 용의가 있다.'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의 관저 벽에 붙은 정책구호다.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개혁을 향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의가 가득하다.

*** 시리즈 취재팀 = ▶국제부 = 김동균 (팀장) , 이철호.최형규.이훈범.김현기 기자 ▶특파원 = 김석환 (모스크바) , 배명복 (파리) , 신중돈 (뉴욕) , 김종수 (워싱턴) , 오영환.남윤호 (도쿄) , 유상철 (베이징) , 진세근 (홍콩) 기자 ▶해외취재 = 민병관. 권영민. 이상일. 이규연. 강서규. 정선구. 예영준 기자 ▶사회부 교육팀 = 오대영.강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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