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열도 구조조정 태풍] 총수가 전면나서 속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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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구조조정에 임하는 일본 기업들의 태도는 자못 비장하다.

장기불황 속에 경쟁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다는 점을 절박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허약한 체질로는 21세기 기업생존이 불가능하다는 반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이다.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다.

노나카 이쿠지로 (野中郁次郎) 지식과학연구소장은 "기업들이 인원삭감에 초점을 맞춘 리스트럭쳐링이나 리엔지니어링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고 지적했다.

이처럼 스스로 필요성을 절감하다보니 우리나라와 달리 필요한 부분을 스스로 찾아 신속하게 대처해 나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전문가들은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이 성공할 경우 세계 경제질서에도 적지않은 파급효과를 예상하고 있다.

◇ 생존을 위해 자발적으로 한다 = 일본의 구조조정은 속도와 방법 면에서 우리와 차이가 많다.

정부가 먼저 운을 떼고 은행이 채권자의 자격으로 정부의 뜻대로 몰아가는 한국식과는 완연히 다르다. 생존을 위한 절실한 필요에 의해 스스로 재촉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각 기업들이 나름대로 대안을 들고 나오고 있다. 한국처럼 획일적으로 인원.임금을 몇% 깍거나 인위적으로 사업교환을 벌이는 경우는 없다.

한국의 '빅딜' 처럼 말만 꺼내놓고 미적거리지도 않는다. 흡수합병 (M&A).사업교환.설비폐기 등을 발표할 때는 해당 기업의 총수가 직접 나와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못박아 설명한다.

쫓기듯 서둘러 원칙만 정하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지루한 실무협상에 들어가는 법이 없다.

전자.컴퓨터 업체인 NEC도 니시가키 고지 사장이 직접 나서서 "3년내에 1만5천명 (국내 9천명, 해외 6천명) 을 감원하고 2조4천억엔에 달하는 부채도 6천억엔 규모로 줄이며 수익성 낮은 사업은 과감히 정리하겠다" 고 선언했다.

◇ 정부는 분위기만 조성한다 = 반면 일본 정부는 분위기만 조성한다.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총리는 지난달 산업계 대표를 참석시킨 산업경쟁력회의를 주재하면서 "주로 과잉설비 해소에 초점을 맞춰 제조업의 생산성을 높여 경쟁력을 강화하겠다" 고 선언했다.

정부차원에서 내놓은 후속조치도 별다른게 없다.

다만 공정거래위원회가 철강.유화 업종에서 잇따라 일고 있는 설비폐기에 대해 '불황카르텔' 이라는 지적을 내놓자 통산성이 무마하고 나섰다.

또 대장성과 통산성은 은행과 업계 대표에 대해 대출금의 출자전환이 바람직하다고 '제시' 만 했다.

한국처럼 금융감독원이 지침을 정하며 개입하지는 않는다.업계와 금융기관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다.

◇ 성공하면 큰 파급효과 = 일본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성공할 경우 한국에도 파급효과가 적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구조조정이 가장 활발한 전자.자동차.철강.유화산업은 모두 한국과 경쟁관계에 있는 업종. 이들이 구조조정의 기선을 잡고 경쟁력을 강화할 경우 한국 기업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자동차의 경우 이미 닛산이 르노와 제휴해 세계 4위로 부상했고 미쓰비시가 마쯔다와 손을 잡은데 이어 미국의 포드와의 제휴도 검토중이어서 한국 자동차회사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또 과잉설비폐기.인원감축.외자유치등을 통해 일본 기업들의 제조원가를 크게 낮출 경우 한국 기업을 한층 더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포괄적으로 보면 일본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일본경기가 되살아나면 한국 상품에 대한 수입 (輸入) 수요가 늘어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두 나라간의 구조조정의 속도나 범위에서 차이가 벌어질수록 시장지배력의 차이도 확대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하고 있다.

도쿄 = 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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