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이헌재 금감위원장 '선문답 풀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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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이헌재(李憲宰) 금융감독위원장의 행보가 최근 들어 더욱 주목거리다.

5대그룹의 구조조정 시한이 임박하면서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아무리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해도 예사롭게 흘려들을 수 없다. 대부분 꿍꿍이속이 들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에는 기자간담회를 자청, '5대그룹 빅딜은 쌍용자동차 방식이 교과서' 라는 말을 가볍게 던졌었다. 5대그룹 스스로가 빅딜 과정에서 불거져나오는 부실을 책임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지만 결국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 계획을 예고한 셈이었다.

사실 삼성자동차 문제만 해도 한달쯤 전에 이미 '명예롭게 처리하는 방향을 찾아야 한다' 고 밝혔었다. 정치권에서 공연히 큰소리 내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5대재벌에 돈이 쏠리는 것이 문제라며 '회사채 인수 제한' 이라는 그의 한마디에 재벌들은 그날로 홍역을 치러야 했었다.

그의 말은 기발하기로 정평이 나있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정부가 기업더러 외자를 유치하라고 윽박지르는데 그러다가 기업의 종잣돈까지 파는 것 아니냐" 는 질문을 받자 그는 "당장 죽을 지경인데 내년에 뿌릴 씨라고 껴안고 있다 굶어죽으면 무슨 소용이냐" 고 거침없이 되받았다.

합병은행 임원들을 만난 자리에서는 "합병은행이 제대로 굴러가려면 골목대장이 없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 며 직격탄을 날렸다.

'금융 구조조정' 필요성을 역설할 때는 오염된 팔당호의 수질개선 작업이 단골 비유다. 단기적으로는 수돗물 공급에 문제가 있더라도 퇴적물 (부실기업)을 건져내면서 동시에 유입수를 정화(경영혁신)하는 작업까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일.서울은행에 정부가 돈을 빌려준 것은 '긴급피난(緊急避難)'이라는 용어로 피해나갔고, 한빛은행에 뭉칫돈을 끌어붓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신문이 표현한 '일시적 공적 지배' 란 말로 둘러댔다.

말이 재미있다고 그냥 듣고만 있어서는 안된다. 어눌한 듯하면서 술술 흘러나오는 그의 말에는 항상 저의가 있다.

'의미있는 합병이 이뤄지려면 1+1=1.2 정도의 시너지 효과가 필요하다' 는 말이 '은행당 인원감축 비율 40% (0.4)' 로 돌변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때 "2백%라는 표현을 쓴 적이 없다" 고 발을 뺐지만 금감위원장 취임과 거의 같은 시기에 흘러나왔던 부채비율 2백%는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지켜야 하는 지상과제가 됐다.

한 강연회에서 그가 흘린 "부채비율이 4백%를 넘는 기업에 대한 대출에 20~30%의 충당금을 설정토록 하면 은행들이 대출취급을 기피할 것" 이라는 발언에 대해 일부에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다 이런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빅딜' 에 관해서는 매우 말을 조심해 왔다.

정부와 정치권이 그토록 빅딜문제를 강조해 왔음에도 李위원장은 여태 한번도 공식석상에서 빅딜을 재촉한 일이 없다.

여건을 조성해놓고 결정타를 날려야지 무작정 밀어붙이다간 공연히 부작용만 초래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젠 타이밍이 됐다" 는 그는 최근 들어 '마무리' 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수술도 시간을 너무 오래끌면 안좋듯이 개혁도 무작정 시간을 끌어서는 안된다" 는 것이다.

"기업들이 개혁에 구체적인 성의를 보이기만 하면 정부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마지막 찬스임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 깔려 있다.

큰소리만 치다가 제대로 안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주변의 걱정에도 그는 느긋하다.

"어차피 욕을 먹을 자리인데 물러날 때까지는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소신껏 하기로 작심했다" 고 대답한다.

골프도 주말이면 눈치 안보고 치러 나간다. 그 대신 아무리 친한 친구와 쳐도 자기비용은 자기가 낸다.

어쨌든 요새 李위원장의 기분은 결코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구조조정작업도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데다 세계적인 컨설팅회사 로스차일드의 미스터 로스도 그를 "한국 최고의 해결사" 라고 치켜세웠다고 하니 말이다.

박장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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