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새째 현정은 안 만나준 김정일, 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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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회장은 평양 체류 닷새째인 14일 오후까지도 김 위원장과 만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초 방북할 때의 기대는 10일 평양에 도착해 김 위원장을 만나고 12일 서울로 귀환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현 회장은 세 차례나 일정을 연장해 가며 15일까지 평양에 체류하는 쪽으로 일정을 수정한 상태다.

북한 관영매체들은 현 회장이 평양에 머무는 동안 김 위원장이 지방 현지지도를 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래서 김 위원장과의 면담을 위해 현 회장 일행이 마치 버티기에 들어간 듯한 형국이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귀환을 기다리는 취재진들이 설치해 놓은 삼각대와 사다리가 14일 경기도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 입경장에 세워져 있다. [파주=김성룡 기자]

정부 당국자들은 방북하는 현 회장 편에 정부 차원의 대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일각에선 김 위원장이 아무런 선물도 들고 오지 않은 현 회장과의 대면을 마뜩잖게 여기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정부 트랙과 별개로 대북 사업과 관련해 민간 기업 트랙에서 현 회장과 김 위원장 간에 논의할 사항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면담 불발을 놓고 이런저런 의문이 증폭되고 있다.

가장 유력한 분석은 김 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담길 대북 메시지를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유성진씨 석방 같은 대남 유화 조치를 했으니 남측이 얼마나 화답할지 지켜보겠다는 의도라는 얘기다. 이럴 경우 15일 오후가 지나야 면담 여부가 최종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현 회장이 들고 간 대북 보따리가 북한의 요구 수준과 맞지 않아 면담이 진통을 겪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중단된 금강산·개성관광 재개나 개성공단 활성화를 위해 현대가 어떤 상응 조치를 하느냐는 문제다.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13일 평양에서 현 회장과 만난 것도 이를 타진하려는 움직임일 수 있다. 정부 당국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와 달리 현 회장이 북한이 만족할 만한 대북 제안을 가져가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북한 권력 내부에 노선 갈등이 불거졌기 때문이란 진단도 나온다. 지난 1월 “대남 전면 대결 태세에 진입하겠다”며 강경 입장을 보여 온 군부 등이 최근의 유화 분위기에 불만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대 남주홍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군부 입장에서는 남측과 한판 붙겠다고 벼르다 그냥 수그러든 셈”이라며 “현 회장 방북을 놓고 내부 논쟁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극적인 면담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돋보이게 하려는 이미지 제고 전술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은 “ 김 위원장이 드라마틱한 요소를 면담 정치에 가미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이란 주장도 있다. 북한 매체들은 함흥 해군대학이나 원산 송도원 등의 방문 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해안에서 요양 중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화여대 조동호(북한학) 교수는 “김 위원장은 면담을 지연시킴으로써 ‘뭘 논의할까’에 쏠린 관심을 ‘만남 자체’ 쪽으로 옮겨지게 하는 효과를 거두었다”며 “막판에 만나 주면서 자신이 판을 주도하고 무리한 요구를 해 올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했다.

글=이영종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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