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에서 만난 사람들]2.곱지만 당찬 북한여성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보통강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황소 울음소리처럼 우렁찼던 평양 도착 이튿날 아침. 우리는 호텔 식당에서 평양 출신의 젊은 여성과 첫 대면을 했다.

우리들이 둘러앉은 둥근 식탁의 당번은 리선영 (21) 이란 접대원이었다.

주홍색 원피스 위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키 큰 아가씨가 우리들의 식탁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은 당당했으나 정숙했다.

초면의 그녀에게 처음으로 말문을 튼 사람은 아무래도 두번째 방북으로 심리적 여유를 가졌던 유홍준 (兪弘濬) 교수였다.

兪교수가 그녀의 이름과 나이를 물어 손색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사이, 우리는 저마다 귀를 곤두세우고 그녀의 대답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질문과 대답 사이, 우리들의 질문이 길어지면 그녀는 눈길로 주방과의 연락을 주고 받을지언정 대화를 두 동강내고 식탁을 떠나는 법은 없었다.

식탁의 당번은 순서에 따라 날마다 교체됐다.

다시 만난 접대원은 김화복 (23) 이었다.

리선영보다 약간 작은 키의 이 아가씨가 쟁반을 들고 걸어가는 모습은 내 사실적인 표현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인상적이었다.

그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교태스러웠다면 실례가 될까. 식탁에서 차반을 든 채로 서서 장시 (長詩) 한 편을 발성의 높낮이를 밀도감있게 배합하면서 암송했던 그녀의 낭랑한 음색과 긴장감을 유지하는 발성법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기가 충분했다.

그러나 아침 식탁에서 스스럼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그녀들과 포즈를 취하고 찍은 사진 한장도 지금은 내게 남아있지 않다.

장마로 말미암아 첫날의 금강산 탐승길에서 삼선암의 하반신만 만나고 하산했던 우리는 호텔 옆에 있는 온천장으로 향했다.

바로 그 온천장 식음료매장에서 '도라지' 를 '더라지' 로 발음하는 것 같은 강원도 아가씨 리은숙 (23) 을 만났다.

북한 체류 며칠동안 벌써 넉살이 생긴 우리가 신덕샘물 한병을 시켜놓고 노래를 청했더니 그녀는 두말없이 '심장에 남는 사람들' 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김민기의 '아침이슬' 도 완벽하게 소화해 냈다.

그처럼 우리는 북한 체류 14일 동안 아가씨들에게 노래를 청해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심지어 평양시내 옥류관에서 복무하는 접대원에게도 노래 한곡을 청했었지만 실패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럴까. 그녀들이 부르고 있는 노랫말에 담겨 있는 통치자에 대한 강도 높은 찬양성과 인생에 대한 긍정적 신뢰감은 정신적 친화력과 정화력을 함께 소유케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래는 조금도 쑥스러울 게 없고 굳이 사양해 내숭 떨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노래부르기는 어느덧 그들의 전통적 정서로 정착됐고, 생활 그 자체란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터놓고 노래듣기에 극성을 부렸던 것은, 초면의 사람들과 친숙한 사이처럼 진솔한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내는 단초로서는 그만큼 적절한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던 아가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금강산 온정리려관 선물용 매장에 복무하고 있었던 노경란 (25) 이다.

그녀는 강원도 원산의 동해고등중학과 경제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금강산 온정리려관으로 배치돼 벌써 5년째 매장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알뜰했지만 극성스럽게 보이지 않고, 적극적이었지만 요란하지 않은 복무태도와 성품의 소유자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희나리처럼 속으로 타고 있는 여성같이 보였다.

상당히 부끄러움을 탔으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여축없이 감당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녀의 오빠는 원산시의 당일꾼이고 손위의 두 언니는 재봉연구소에 복무하고 있다고 했다.

노경란은 이 호텔에 숙식하면서 한달 1백30원의 급료를 받고 있었다.

'예쁘다' 는 말을 북한에선 '곱다' 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런 칭찬을 건네자 그녀는 금강산 8담에 내려와서 승천하지 못하고 속세를 살게 된 8선녀의 전설을 나직나직하게 들려주었다.

조용하지만 할 말은 다하는 성품을 가졌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배당된 근무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라운지에 투숙객이나 고객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한 매장을 닫지 않고 지키고 서 있었다.

우리 일행이 일정에 따른 금강산 탐승을 위해 배낭을 챙겨들고 라운지로 내려오기 전 그녀는 남보다 먼저 매장으로 나와 닦고 윤기내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체류했던 6일 동안 3일 정도를 제외하곤 투숙객들은 거의 우리 일행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고,끝내는 그녀의 열성적인 복무 태도조차 시험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녀의 매장에는 '양기보' 라는 강장제를 팔고 있기도 했는데, 그 약품의 효능을 소개한 전단은 매우 광범위하고 길어서 언뜻 보아도 원고지 6~7장 분량은 됨직했다.

그 전단을 객실에서 숙지하겠다는 핑계를 만들어 내용을 빠짐없이 복사한 두벌의 전단을 요구하고 객실로 돌아갔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일찍 예외없이 매장으로 출근해 청소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고, 나는 그녀가 손수 꼭꼭 박아 필기한 두벌의 전단을 건네받았다.

지난 저녁 내가 그녀 손수 베껴 쓴 전단을 요구했을 때, 대꾸만 하고 적당히 얼버무린 채 지나쳐버릴 것이란 예상을 했었다.

아니면 이미 매장에 비치해둔 전단을 가져가서 읽은 뒤 돌려달라는 대답을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요구대로 두벌의 전단을 밤새 손수 베껴온 것이었다.

북한의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든 국가가 지정해주는 직업에 순응하며 열성적으로 복무한다는 정신 한가지는 투철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두산 등정길, 삼지연의 베개봉려관 매장에서 복무하고 있던 김홍실 (24) 의 경우도 그런 아가씨였다.

그녀는 예술고등중학에서 악기연주를 전공했었는데, 국가가 그녀에게 지정해준 직업은 베개봉려관 매장의 판매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와 말문을 튼 이후부터 행동거지가 눈에 띄게 산만해지기 시작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낌새가 역력했다.

갑자기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태어나서 스물다섯살이 되는 지금까지 남한 사람을 처음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심란하기 그지없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구태여 소녀적인 동경심은 없었다 할지라도 평생 만나볼 수 없을 사람들로 여겨만 왔던 남한 사람을 꿈도 아닌 현실에서 만나고 있는 그녀의 일손이 제대로 잡힐리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

설혹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끼리라 할지라도 '만남' 이란 것은, 육질화된 정치적인 견고성과 종교적인 사랑과 신뢰감까지도 무릇 초월해 인간의 내면에 깊이있게 투영돼 애틋한 정한을 남길 수 있는 유일한 사회적 수단이라는 것을 나는 예고되지 않았던 그녀와의 짧디짧은 만남을 통해 터득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백두산 등정을 마치고 평양으로 출발하려는 날, 그녀는 검은색 투피스를 단정하게 차려 입고 라운지에 나타났다.

나는 그녀에게 하필이면 왜 떠나는 날에 곱게 차려 입고 나타났느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이었다.

"손님들이 좋은 인상을 남기고 떠나시라고요. "

글 = 김주영 (소설가) 사진 = 김형수 (통일문화연구소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