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브레이크 필요한 주민소환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김태환 제주지사는 ‘정상적으로’ 도정(道政)을 이끌고 있다. 회의를 주재하고, 행사에 참석하고, 주민들을 만나 토론한다. 주민들의 뜻에 반해 서귀포에 해군기지를 추진한다는 이유로 광역자치단체장으로서는 처음으로 주민소환 투표 대상이 될 것이 확실한 그다. 김 지사는 “우리 사회의 자율적 조정 기능을 신뢰한다”는 것 이외에는 말을 아끼고 있다.

김 지사의 조용한 움직임과 달리 도민들은 첨예하게 갈려 있다. 주민소환을 추진하는 시민단체는 지난달 14일 소환투표를 청구하는 데 필요한 서명을 받기 시작해 18일 현재 그 숫자가 5만7000명을 넘겼다. 여기에 맞서 보훈단체 등 해군기지 건설을 찬성하는 쪽은 연일 집회를 열고 “명분 없는 맹목적 반대를 그만두라”고 목청을 높인다.

2007년 7월 시행된 주민소환제가 2년이 채 안 돼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 제도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 등 선출직 지방 공직자를 ‘리콜’하는 제도다. 예전에는 선거로 당선된 공직자가 마음대로 권한을 행사해도 형사처벌이 확정될 때까지 주민들은 손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소환제가 생겨난 뒤에는 위법행위를 한 공직자뿐 아니라 무능하고 부패한 공직자를 유권자가 해고할 수 있게 됐다.

주민소환제의 출발은 선출직 공직자가 유권자에게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싫어하는 공직자는 물러나야 한다. 주민소환법 제7조 1항에서 소환 청구 사유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조항이 소신행정을 발목 잡는 빌미로 작용하고 있다. 김 지사도 “비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주민소환을 추진하면 어떻게 일할 수 있느냐”며 반발한다. 김황식 하남시장은 2007년 광역화장장을 유치하겠다는 계획 때문에 주민소환 투표까지 갔다 투표율 미달로 가까스로 살아났다.

정치적 라이벌이나 의도를 가진 사람이 해코지하려 할 때 현행법은 취약하다. 광역단체장에 대해서는 유권자 10%의 서명이 있으면 주민소환 투표를 청구할 수 있고, 유권자 3분의 1이 투표해 과반수가 찬성하면 공직자는 물러나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유권자 17%의 표만 모으면 공직자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얘기다.

주민소환제를 운영하는 데 지불해야 하는 대가도 만만치 않다. 투표 공고일부터 투표일까지 소환대상자의 권한행사가 정지됨으로써 30일 정도 해당 기관의 행정이 사실상 올스톱된다. 여기에 투표 비용을 전액 자치단체가 부담해야 한다. 제주도에서 소환투표를 하려면 19억2600만원의 예산이 들어간다. 이 돈은 물론 제주도민이 낸 세금이다. 하지만 투표 결과가 어떻게 나오더라도 어떤 단체·개인도 한 푼 내지 않는다.

정부가 이런 문제점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직무유기, 직권남용, 법령 위반 등의 경우에만 소환을 청구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지방자치에 대한 주민의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공직자가 소신있고 투명한 행정을 펼칠 수 있도록 빨리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김상우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