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은행, 재벌간 '빅딜' 제동…"독과점 심화돼선 곤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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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세계은행이 한국에 대한 70억달러의 자금지원 조건으로 "경쟁을 제한하는 기업 인수.합병이나 사업교환 등은 허용하지 말라" 고 요구하고 나섰다.

구조조정 차원에서 인수.합병을 막을 수는 없지만 이것이 특정기업의 독과점을 심화시키는 결과가 돼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또 재벌이 매각하는 사업부문은 국내기업뿐만 아니라 외국기업에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최근 정치권의 주도로 추진되고 있는 국내 대기업간 '빅딜 (대규모 사업교환)' 에 세계은행이 제동을 건 것으로 해석돼 주목된다.

정부 당국자는 14일 "세계은행이 지난해 30억달러를 지원할 때는 선언적 의미의 요구만 했으나 이번 70억달러의 구조조정차관 (SAL)에 대해서는 구체적 정책권고 (policy measure) 를 제시했다" 고 밝혔다.

세계은행은 이 정책권고를 통해 대기업 구조조정은 시급히 이뤄져야 하나 이 과정에서 국내시장의 독과점상태를 심화시키는 인수.합병이나 사업교환은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또 부실기업 인수나 국제경쟁력 향상을 위해 필요한 경우 등 현행 공정거래법이 인정하고 있는 기업결합 규제의 예외적용 범위도 최소한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신 인수.합병이나 사업교환 등의 허용여부는 30일 이내에 신속히 결정해 공표하도록 했다.

한편 세계은행은 가격담합이나 생산량 조절 등 국내외 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공정위의 감시.조사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특히 압수.수색 권한을 강화하라고 요구했다.

공정거래법 위반에 대한 처벌규정도 외국에 비해 약하다고 지적하고 과징금 부과기준을 높이는 한편 사법처리 권한이 부여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기업 민영화에 대해서도 국내외기업에 차별을 두지 말고 민영화 기준은 투명하게 제시할 것을 권고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세계은행의 정책권고는 앞으로 정부정책의 잣대를 시장경쟁을 제고하는 데 둬야 한다는 것" 이라며 "이 때문에 국내 재벌간 빅딜을 무리하게 추진할 경우 세계은행의 반발을 살 수 있을 것" 이라고 설명했다.

정경민·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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