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연애편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작고한 국문학자 양주동 (梁柱東) 박사가 1920년대 후반 일본 와세다 (早稻田) 대에 유학했을 때의 일이다.

일찍부터 문명 (文名) 을 떨쳤던 그는 서울에서 짝사랑했던 어떤 아름다운 전문대 여학생을 도무지 잊을 수 없어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온갖 미사여구 (美辭麗句) 를 총동원한 그의 편지는 막상 당사자에게 전달조차 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없어져 버리곤 했다.

그 여학생이 다니던 학교가 미션 스쿨이었으므로 기숙사 사감 (舍監) 의 사전검열을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양주동 학생은 궁리 끝에 묘안을 짜냈다.

성경 (聖經) 가운데서 '사랑' 과 관련한 대목을 뽑아 내 '요한복음 몇 장 몇 절' '마가복음 몇 장 몇 절' 하는 암호 같은 연서 (戀書) 를 보낸 것이다.

사감은 성구 (聖句) 를 암송하라는 편지라고만 생각하고 이 편지를 여학생에게 전달했고, 여학생은 밤새도록 성경을 뒤져 양주동의 참뜻을 알아차리고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겠노라 회신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한평생 온갖 종류의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도록 돼 있지만 그 형식이나 내용에서 사랑을 나타내는 것만큼 '절실' 한 편지는 없다.

주고 받는 사람의 마음이 교감 (交感) 을 이루지 않으면 연애편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18세기 유럽에서 한동안 서간체 (書簡體) 소설이 문학의 대종 (大宗) 을 이뤘던 것도, 특히 독일의 문호 괴테의 '희망 없는 연애' 를 묘사한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불후의 명작으로 남게 된 것도 연애편지의 본질을 일깨우는 사례다. 서로사랑한다면 그 연애편지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다 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이 일방적인 것일 때는 부작용을 낳게 마련이다.

보내는 입장에서는 "단지 내 생각을 펼쳐 보인 것뿐인데 무슨 죄가 되느냐" 는 항변이 나올 법도 하지만 우리 인생살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니 문제다.

동료교사의 남편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해임된 한 40대 여교사의 해임처분 취소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원고 승소인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당사자의 생각이 아무리 '순수' 했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탓이니 딱한 일이다.

연애편지도 함부로 써서는 안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