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 첫 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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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도슈사이사라쿠 (東洲齋寫樂) 는 18세기말, 아니 1794년 단 한해 일본에서 활동했던 풍속화가다.

화가가 단지 한 해만 활동하고 그만두다니 - .자료를 파고드는 데는 선수인 일본학자들이 그렇다고 한 것이므로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불과 8달 남짓한 기간 동안 그는 일본 전통연극인 가부끼 배우들의 얼굴을 새긴 판화 1백50여 점을 남긴 채 종적을 감췄다.

그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10년. 독일의 동양미술 연구자 율리우스 쿠르트가 유럽에 퍼져있는 그의 작품을 모아 '사라쿠' 라는 책을 펴내면서부터다.

깜짝 놀란 일본인들이 새롭게 그의 연구를 시작해 지금은 그에 관한 단행본만 해도 40종을 넘는다.

아직도 그가 누구였던가는 분명치 않지만 그는 에도 (江戶) 말기 배우들의 사실적인 얼굴을 그린 최고의 인물풍속화가 대접을 받고 있다.

우리에게도 그를 능가하는 풍속화가가 존재했다.

혜원 (蕙園) 신윤복 (申潤福) 이다.

달빛이 훤히 비치는 골목길 한 쪽에 점잖게 차려입은 젊은이와 곱게 꾸민 여인이 남이 볼 새라, 부끄러울 새라 은근 슬쩍 만나 정분을 나누는 그림을 그린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 역시 1910년부터 알려진 화가다.

1910년 李왕가박물관이 일본인 곤도 (近藤佐五郎)에게 화첩 한 권을 사들인 속에 '아기업은 여인' 같은 그의 그림 2쪽이 들어 있어 그는 미술사 속에서 되살아나게 됐다.

그후 25년 뒤 국보 1백35호로 지정된 30쪽 짜리 '혜원전신첩 (傳神帖)' 이 간송미술관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는 신기 (神技)에 가까운 솜씨로 조선시대 후기의 시정 (市井) 풍속을 그린 화가로 자릴 잡았다.

그러나 그림을 제외하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조선시대 문집에 흔히 나오는 글줄조차 그를 향한 것은 없다.

기록으론 대 감식가이자 미술사가였던 오세창 (吳世昌) 이 그의 책에서 단 두 줄로 그를 묘사한 것이 전부다.

'자는 입보 (笠父) 요, 호는 혜원. 본관은 고령이며 부친은 신한평 (申漢枰) .도화서 화원으로서 벼슬은 첨사 (僉使) 를 지냈다.

' 출생연도나 사망연도조차 없다.

그때가 1928년. 그후 10년 뒤 문일평 (文一平) 이 '점잖지 못한 그림을 그려 도화서에서 쫓겨났다' 라고 언급한게 그나마 그에 관해 남겨진 유일한 에피소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금년 첫 전시로 '혜원 신윤복' 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그의 작품은 25점. 그가 남긴 50여점 가운데 절반 규모다.

또 어렵사리 찾아낸 그의 가계 인물들이 남긴 작품도 25점이 소개된다.

이번 전시는 그의 유명한 풍속화 뿐 아니라 그의 활동을 산수와 동물그림 그리고 글씨까지 확대해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췄다.

모처럼 일반에 소개되는 그의 산수화 '송정아회 (松亭雅會)' '계명곡암 (溪鳴谷暗)' 은 그윽하면서 맑은 풍치가 가득해 남종문인화의 명품으로 손색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장기는 여전히 풍속화에 있다.

상상하기 어려웠던 조선시대 후기의 아름다운 여인 이미지를 분명하고 뚜렷하게 우리 머리 속에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배추잎처럼 부푼 담청색 치마에 약간 단이 짧아보이는 저고리. 그리고 조금 고개를 숙인 앳된 얼굴에 실처럼 가느다랗고 고운 눈썹에 다소곳한 콧날과 좁은 입이 '아 사랑스러워라' 하는 감탄을 절로 일게 한다.

최근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혜원의 본명은 신가권 (申可權) 이며 조선중기 화가인 신말주의 7대손이란 것이 새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라이프 스토리라든가 그에 관한 많은 부분이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린 풍속화로 인해 우리들의 18세기가 한층 향기로워졌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전시는 13일부터 3월1일까지 열린다. 02 - 398 - 5134.

윤철규 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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