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사람이 귀하던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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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삼국지를 보면 유비 (劉備)가 조조 (曹操) 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데 많은 백성이 유비를 따라 함께 피난하는 장면이 있다.

백성이 많이 따라오면 행군이 지체되어 조조군의 추격에 걸릴 것이니 백성들이 따라오지 못하게 하자고 참모들은 건의하지만, 불쌍한 백성을 버리고 갈 수 없다고 유비가 고집한다.

결국 일행이 모두 난관에 봉착했다가 조운 (趙雲) 과 장비 (張飛) 의 초인적 활약으로 겨우 벗어나게 된다.

삼국지뿐 아니라 중국 고대의 기록을 보면 백성이 많이 따르는 것이 나라 잘되는 기본조건으로 여겨진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가 잘되면 백성이 모이고, 잘못되면 백성이 떠난다는 것이다.

이 (李) 씨조선 개국을 찬양한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 를 봐도 이성계 (李成桂) 의 조상이 전주에서 삼척으로, 그리고 삼척에서 덕원으로 옮길 때 1백여 호 (戶) 의 백성이 따른 것을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았다.

옛날 임금들이 이처럼 백성을 귀하게 여긴 것은 말 그대로 백성이 귀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농업이 발생한 후 오랫동안 인류문명의 공통현상이었다.

농지로 개간할 땅은 넉넉히 있는 반면 인구는 적으니 인력의 확보가 경제력의 제1요건이었고, 조세의 부과도 땅보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통례였다.

더 이상 개간할 땅이 없을 만큼 인구가 늘어나자 조세의 대상이 땅으로 옮겨진다.

사람보다 땅이 귀하게 된 것이니, 인류의 농업문명이 한계에 도달한 셈이다.

근대산업문명이란 인구과잉현상의 돌파구로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인간을 귀치 않게 보는 속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것은 그 본성이다.

근대에 들어와 사람 아끼는 일을 '인도주의' 라 이름붙여 굳이 내세우게 된 것은 이 본성이 일그러질 만큼 세상이 험악해진 데 대한 반동이다.

대량살상의 전쟁터와 참혹한 근로조건의 산업현장에서 인도주의의 깃발이 처음 일어선 것도 그 까닭이다.

추석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사람들 중에는 시골 구석구석까지 공장과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것을 보며 착잡한 느낌을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지난 30년 동안 우리나라 인구가 갑절로 늘어난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변한 것이 시골풍경뿐이랴. 줄을 이어 터지는 비인간적 범죄는 사람이 사람을 아끼지 않는 세태의 한 작은 귀퉁이가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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