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째 주문 끊겨 위기” 노조가 경영을 걱정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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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외환위기는 아시아에 국한돼 우리 회사는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가 경제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도 삼각파도 위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18일 오후 경주 보문단지 대명콘도 지하 1층 대연회장. 2박3일간의 수련회에 참여한 200여 명의 현대중공업 노조 대의원과 간부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종쇄(48·사진) 노조위원장이 올해 임금·단체협상 전략이 아니라 경영난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날 모임은 정기적인 단합대회. 오 위원장은 연단에 오르자마자 “오늘은 강의를 좀 해야겠다”고 포문을 연 뒤 속사포처럼 강의를 이어갔다.

“지난해 6월 이후 한 척의 배를 수주하지 못했습니다. 큰 위험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어요. 지금은 불황이 아니라 공황기입니다.”

마치 회사 간부 같았다. 그는 파워포인트 문서를 넘기며 ▶벌크선 운임지수 하락 추세 ▶중국·일본 등의 경쟁업체 동향 ▶세계 경제 전망 등을 설명했다. 점차 참석자들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어려운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일부는 열심히 받아 적었다.

오 위원장은 “노조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며 절약을 체화(體化)할 때”라고 전제한 뒤 “현대중공업이란 동굴에 식량(수주한 선박)은 있다. (중략)지금은 식량을 쪼개서 조금씩 나눠먹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살아남지 않으면 강자가 아니다. 도요타가 무너지고, 삼성도 적자를 내고 있다. 살아남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려면 노조가 경영을 얘기하고, (경영에)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1시간가량의 강의가 끝났다. 김헌수(건조2부) 대의원이 “선박 인도 연기나 취소 요청이 어느 정도 들어오나.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불안 요소이니 정확히 알려 달라”고 질문했다. 오 위원장이 답하자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위원장이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항의했을 법도 한데 이날만은 그렇지 않았다.

오 위원장은 “지금은 종전 방식의 노사 관행을 깨야 하고, 투쟁과 요구보다 자기 혁신을 먼저 해야 할 때”라며 “올해 임금협상은 교섭 없이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임금협상 회사 위임, 임금 동결을 선언한 것이다. 87년 노조 창립 이후 무교섭 임금 동결은 이번이 처음. 매년 관례적으로 받아온 성과 격려금(300% 보너스+200만원) 지급 여부도 회사에 맡길 방침이다.

조합원 김성호(51·조선공사지원부)씨는 오 위원장의 강의 내용을 전해 듣고 “차입경영 얘기가 나올 정도로 회사 사정이 어려운 걸로 안다”며 “전 조합원의 고용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외국에 좋은 노사관계 이미지를 심어주면 수주가 늘 것이고, 경영이 호전된 뒤 회사가 성과급 등을 챙겨줄 걸로 믿는다”고 말했다.

삼성중공업·대우해양조선·한진중공업 등의 경쟁사들은 오 위원장의 강연 내용을 넘겨 받아 직원 교육에 활용할 예정이다. 현대중공업 김종욱 노무 담당 상무는 “노조위원장이 간부에게 경영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대단한 결단을 했다”고 말했다.

경주=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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