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프랑스 총리 살린 지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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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세계적인 축구 스타 지네딘 지단이 프랑스와 장피에르 라파랭 총리를 동시에 구했다.

지단은 지난 13일 2004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4)에서 침몰 위기에 몰린 프랑스 팀을 살려냈다. 이날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벌어진 영국과의 예선 첫 경기에서 지단은 마지막 추가시간 3분 동안 연거푸 두 골을 성공시켜 0-1로 뒤지던 경기를 기적처럼 뒤집었다. 특히 마지막 골은 13초를 남겨둔 상황에서 성공시킨 페널티킥이어서 프랑스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경기를 중계하던 프랑스 TV채널 TF1의 아나운서는 "지단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이날은 프랑스에서 유럽의회 의원선거가 실시된 날이기도 했다. 프랑스 집권여당인 대중운동연합(UMP)은 여론조사 결과를 통해 이미 불리한 판세를 읽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거기간 내내 이번 선거를 큰 정치 쟁점으로 부각하지 않으려 했다. 때마침 축구를 좋아하는 국민을 일거에 사로잡을 수 있는 유로 2004라는 초대형 호재를 만났고, 개표와 동시에 날아든 '믿기지 않는' 낭보는 선거 결과를 희석하려는 자신들의 의도와 기대 이상으로 맞아떨어졌다. 투표가 끝난 뒤 야당 당사에서는 선거 승리를 자축하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비쳤지만 UMP 당사에서는 축구 승리를 축하하는 사람들의 모습만 반복해 나타났다.

14일 저녁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선거 패배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속셈을 드러냈다. UMP가 선거에 졌지만 "현 정부는 지속될 것이며 임무를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라파랭 총리에 대한 신임을 거듭 표명하고 개각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라파랭 총리는 지난 3월 주 지방선거 패배 이후 국민 사이에서 줄곧 교체 여론이 높아져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패배할 경우 경질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돼 왔다. 그러나 유로 2004라는 변수 때문에 분위기가 반전한 것이다.

13일 투표에 참여한 프랑스 국민은 전체 유권자 4151만여명의 43%인 1776만여명이었다. 프랑스 언론들에 따르면 프랑스와 영국의 축구경기는 프랑스 국민 1600만명이 지켜봤다.

박경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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