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유래>과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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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중앙일보사가 실시한 전국도시평가에서 2년 연속'가장 살기좋은도시'로 꼽힌 과천의 기록상 맨처음 이름은 고구려때의'동사힐(冬斯)'또는'율목(栗木)'. 삼국시대초기 백제 땅이었다가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고구려로 주인이 바뀌면서 붙여진 이름인 듯싶은데'동사힐'은'해돋는 고을'혹은'산이 많은 고을'이란 뜻.학자들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대략 이곳 주위에 관악.청계등 산이 많아 붙여졌음직 하다.

또 율목이란 지명은 이곳에 밤나무가 많아 붙여졌을 것이라는 주장과 남태령을 넘나들어야 하는데서 받(山)넘이(踰)>받나미>반나미>밤나미로 전음(轉音)된 것을 다시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이란 주장등 두가지 설(設)이 있다.

어쨋든 이같은 지명은 그 후에도 계속 율목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의 경덕왕때 율진(栗津)으로,다시 고려초(940년)에 과주(果州)를 거쳐 조선 태종13년(1413)에 이르러 오늘날과 같은 과천이 되었다.

과천은 조선시대 6개의 간선도로중 서울과 전남해남을 잇는 제주로(제5로)의 서울턱밑에 위치한 관문으로 삼남지방에서 한양을 가자면 수원을 거쳐 이곳을 지나지 않으면 안되었다.특히 제주로변에는 군포.수원.오산.신장.소사.안양.석곡산(安山)등에 닷새마다 장이 서 이곳을 거쳐 한양으로 가려는 상인들과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로 북적거렸다.

이때문에 과천현감 관할하에 양재.과천등 두곳의 역이 설치돼 있었는데 워낙 물(?)이 좋았던 까닭에 대개 세도가 자제들이 차지해'감사면 다 평양감사고 현감이면 다 과천현감이냐'란 말이 생겨났다.당시 남쪽에서 한양에 가려면 다섯번의 문세(門稅)를 물어야했다.지금의 제2정부종합청사 자리에 있던 동헌앞에서 벼슬아치들에게 뜯기는 통과세를 시작으로 남태령을 넘을 때면 도둑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명목으로 군졸들에게 고개넘이돈(越峙錢)을 바쳐야 했다.

여기에 노량진 도강세,남대문 문지기세,육조의 별감이나 사령에게는 예전(例錢)을 물어야 했다.이같은 세상이다 보니'서울이 낭(낭떠러지)이라니까 과천서부터 긴다'는 말이 생기지않고 배기겠는가.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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