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일의 Inside Pitch Plus <88>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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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호 16면

2주 전쯤 박찬호를 만났을 때였다. LA 다저스와의 결별은 기정사실이었다. 그가 내년에 어느 팀에서 뛰게 될지 궁금했다. 그도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입에서 의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월드 챔피언 필라델피아 필리스.”

월드 챔피언은 박찬호를 보고 있었다

그는 그날 필리스 말고도 네 팀 정도를 더 얘기했다. 그러나 모두 구원투수로서 자신을 원하고 있다고 했다. 필리스에서는 구체적 금액도 제시했고, 선발투수로서 경쟁할 기회도 보장했다며 호감을 보였다. 그리고 지난 15일 그는 필리스와의 계약을 발표했다.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박찬호를 원했다는 건 박찬호로서 자부심을 가질 일이다. 우승팀에서 전력 보강을 위해 점찍은 투수라는 게 기분 좋을 만하다. 스토브리그 초반에 팀이 결정된 것도 경쟁력이 있다는 의미다. 필리스 찰리 매뉴얼 감독은 mlb.com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찬호의 영입으로) 층이 두터워졌다. 그는 (다른 투수들과) 5선발 경쟁을 하게 될 것이다. 그가 구원투수로서도 효과적이라는 것을 안다. 그에게는 긴 이닝을 소화해 낼 능력도 있다. 어떤 게 가장 적합한지 찾아낼 것이다. 그 최상의 역할이 선발이라면, 그 자리가 그의 자리가 될 것이다”

매뉴얼 감독은 박찬호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필리스는 올해 정규시즌 동안 LA 다저스와 일곱 번 만났고 그 가운데 박찬호는 4경기 5이닝 동안 던졌을 뿐이다. 5안타 3실점으로 성적도 신통치 못했다. 게다가 2008년 이전의 박찬호는 기억해 봐야 좋은 게 없다. 그런데 스토브리그에서 빠르게 그를 낚아 올린 건 그를 눈여겨본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거다. 그 모멘텀은 내셔널리그 챔피언 결정전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 시리즈에서 박찬호가 좋은 인상을 남겼다는 의미다.

필리스는 10월 10일부터 일주일 동안 월드시리즈 티켓을 놓고 다저스와 맞대결을 펼쳤다. 그 시리즈 때 박찬호는 5경기(1승4패 다저스 패) 가운데 4경기나 마운드에 올랐다. 4경기에서 1.2이닝을 던졌다. 긴 이닝을 던지지 못했지만 등판할 때마다 제 몫을 했고 실점이 없었다. 10월 12일 2차전 때는 필리스의 간판 지미 롤린스를 삼진으로 잡아 내기도 했다. 박찬호는 “플레이오프는 경기 집중도가 높다. 게다가 챔피언결정전 때는 리그에 다른 경기도 열리지 않는다. 오로지 둘의 승부다. 서로가 서로를 좀 더 의식하고, 집중해 보게 된다. 그때 나쁘지 않았던 게 필리스가 나를 눈여겨보게 된 이유 같다”고 했다.

열린 세상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어떤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애써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평가하고, 가치를 판단하기에 충분한 세상이다. 박찬호도 소리 나지 않는 그런 과정을 통해 메이저리그 다른 팀들의 평가를 받았고 그 가운데 마지막 맞대결에서 인상적이었던 필리스의 낙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자면 기회는 기다리는 사람, 준비하는 사람에게 온다. “어디서 불러 주는 곳 없나” 하고 기다리지 않고 팀을 고를 수 있게 된 박찬호의 변화. 그 변화는 결국 그가 2007년 1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그렇게 준비한 신념의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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