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인프라를세우자>19. 문화예술진흥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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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문화.예술 지원의 본산 한국문화예술진흥원(원장 文德守.이하 문예진흥원)은 올해 정부로부터 한푼도 지원을 받지 못한다.지난해에는 2백억원을 받아 기금적립에 보탤 수 있었으나 올해는 불황과 어수선한 정치.사회 상황 탓으로 지원이 끊겨버렸다.

문예진흥원은 민족문화의 계승.발전과 문화예술의 연구.창작.보급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73년 설립됐다.72년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에 의해 탄생한 문예진흥원의 주요 기능은▶예술창작활동 지원▶국제 문화교류활동 지원▶조사.연구및

교육.문화촉매 활동▶문예진흥기금 조성및 운영▶문화예술공간 운영등 다섯가지다.

이런 기능을 위해 현재 3개 본부 11개 부서에서 1백23명이 일하고 있다.이는 96년의 3개 본부 14개 부서 1백45명에 비해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공무원이나 일반 직장에 비해 턱없이 높은 퇴직금으로 지난해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샀던 문예진흥원 자체의 반성에 따른 뼈아픈 감축으로도 볼 수 있다.83년 이전까지 문예진흥원 임직원들은 대부분'낙하산을 탄'특채로 들어왔다.공공기금으로 문화예술을 엄정하게 진흥하고 지원해야 할 그들의 관료주의적 발상과 행동

이 문제로 불거져나온 것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조직과 예산의 축소가 능사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일고 있다.일방적 감량은 곧바로 문화예술 지원의 감량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문예진흥원의 96년도 세입은 7백22억원이었으나 올해는 5백10억원으로 2백

11억원(29.3%)이나 줄어들 전망이다.또 전년도에는 문예진흥기금으로 3백6억원을 적립했으나 올해는 40억원밖에 적립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어떤 방식에 의해 예산을 공정하게 확보하며, 그 예산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엄정하게 집행하느냐다.문예진흥원의 세입은 국고,한국방송광고공사의 공익자금,개인이나 법인에 의한 기부금,적립기금의 과실금,모금.사업수익및 시설임대 수입

등으로 구성돼 있다.

96년말까지 국고에서 문예진흥기금으로 지원된 총액은 1천2백47억원,공익자금은 6백50억원으로 둘을 합치면 전체 기금 2천7백26억원의 70% 가까이를 차지하고 있다.그러나 올들어 국고 지원이 끊기고 방송광고공사도 지난해부터 한푼도 안내놓고 있다.그래서 문예진흥원은 올해 적립기금에서 나오는 이자와 모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돼 있다.

모금활동은'한국문화예술진흥원은 기금을 조성하기 위해 기부금품 모집금지법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문화부장관의 승인을 얻어 공연장.고궁.박물관.기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고적및 사적지를 관람하거나 이용하는 자에 대해 모금할 수 있다'고 밝

힌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한다.영화나 연극등 문화예술을 즐기는 서민들에게 물리는 준(準)조세적 성격의 돈에 한국의 문예진흥이 기대고 있는 딱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문화예술의 기초적 향수권자(享受權者)들의 그야말로'코묻은 돈'만 바라볼 게 아니라 재원마련을 위한 정부의 확고한 의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그래서 일고 있다.국고에서 일시에 일정액의 목돈을 기금으로 출연해 그 이자로 안정적인 사업

을 펼치게 하자든가,문화복권을 발매하자는등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지난해 문예진흥원에 들어온 기부금 총액은 1백50여억원.대부분 기업에서 내놓은 이 금액중 순수 문예진흥을 위한 것은 4억여원에 불과하다.대부분 기부대상과 사업을 구체적으로 명시한'조건부 기부금'이어서 문예진흥원 사업과는 전혀 별개

의 돈인 것이다.기업이 자사(自社)와 관련있는 사업이나 이미지 선전을 위한 사업을 지정함으로써 문예진흥원은 단순히 기업의 세금감면을 위한 들러리 구실만 하는 셈이다.

지난해 문예진흥원은 총 3천7건의 지원신청 사업중 40% 가량인 1천2백12개 사업에 2백55억원을 지원했다.올해도 총 3천1백42건.8백29억원 지원신청이 들어와 있으나 지원예산은 3백77억원밖에 안돼 60% 가까이는 탈락시켜야

한다.때문에 지원 대상 선정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잡음이 일 수밖에 없다.

지원 절차를 보면 우선 해마다 9~10월 차기연도 지원신청을 공개접수해'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심의위원회'와'분야별 지원심의위원회'의 2원화된 체제로 심사한다.기금지원심의위원회에서 해당 연도의 지원 기본방향을 결정한 뒤 전문예술인및

학자 9인 이내로 구성된 분야별 지원심의위원회에서 지원 대상과 규모를 선정하면 다시 기금지원심의위원회에서 대상을 최종 확정하게 된다.

심의의 기본 원칙은 ▶예술창작활동 우선 지원▶동일조건 다수혜택 우선 지원▶문화격차 해소및 문화복지 실현을 위한 균형지원등이다.그러나 구체적 심의에 들어가면 문화예술 부문.지역.연령을 놓고 갈등이 빚어지게 마련이다.더구나 문화예술의

'질(質)'이란 워낙 추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심의에는 원천적으로 잡음이 일 소지가 크다.그런 만큼 심의과정이 객관성.공개성을 띠어야만 한다.

문예진흥원은 사기업의 문화재단처럼 이미 활짝 피어오른 개인이나 단체 또는 그 질적 수준에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문화예술에만 지원할 수는 없다.공공기금의 성격을 띤 문예진흥기금은 문자 그대로'진흥'의 밑거름을 조성하는데나 국민의 고

른 문화 향수(享受)를 촉진하는데 쓰여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명분있는 재원 확보가 필수적이다.문예진흥원이 기왕 공공성격의 재단으로 출범한 이상 그 재원은 국고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예술의 많은 부분은

상업적으로 자생력이 없어지게 마련이므로 국가적 차원에서의 진흥책은 불가피하다.인간은 시장과 자본의 논리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돈만으로 굴러가는 사회가 얼마나 부패하며 국가를 누란(累卵)의 위기에 올려놓고 있는지 요즘의 사회상

이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이경철 기자〉

<사진설명>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헌법 8조는 밝히고 있다.그'문화입국'의 정신이 무색하게 정부는

문예진흥의 본산인 문예진흥원에 올해 한푼의 예산도 내놓지

않는다.공익자금도 2년전부터 끊겨 안정적

인 문예진흥기금 확보가 시급하다.사진은 문예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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