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코소 일본문화 <4>‘절망선생’에게 한 수 배우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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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07면

이한치한이라고, 기분이 다운될 땐 부러 우울한 만화를 고른다. ‘한 해가 또 이렇게 가나’ 싶어 헛헛한 요즘 일본만화 ‘안녕 절망선생’(구메타 고지 작·학산문화사에서 13권까지 발행)을 다시 집어 들었다. 현재 진도를 빼고 있는 만화들 중 가장 기발하면서도 유치하고, 단순하면서도 골치 아픈 희한한 작품이다.

사소한 일에 비관하고 매사에 절망하는 초네거티브적 사고방식의 소유자 이토시키 노조무(系色望) 선생. 이름의 한자를 붙여 읽으면 ‘절망(絶望)’이 된다. 그가 담임을 맡은 반에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 스토커, 다중인격장애 소녀 등 다양한 유형의 우울한 영혼들이 모여 있다. 수업 내용도 절망적이다. “인생은 뜻대로 안 되는 것투성이”라며 ‘진로 절망 조사’를 실시하고, “심약한 어른이 되면 안 된다”며 ‘상대방 비난훈련’ ‘마음의 암흑 고백하기 대회’ 등을 연다.

유치한 듯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절망 선생은 매회 “절망했다. XX세상에 절망했다”고 탄식하며 일본의 정치·사회·문화에 대해 거침없는 독설을 뿜는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 다자이 오사무 등의 문장을 패러디한 각 장 제목부터 시작해,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이 워낙 방대하고 뜬금없어 일본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웃을 수 없는 부분도 많다. 그렇다고 절망하진 말자. 스토리가 어렵다면 책 뒤편에 있는 작가의 초절정 자기비하 스토리 ‘종이 블로그’를 보라. “히트작이 없습니다. 나는야 만화계의 무안타 제조기” “이 만화 한 권을 읽는 데 ‘드래곤볼’ 1000권의 체감시간이 걸린다는군요” 등 읽는 이도 민망한 자학개그가 만발한다.

게임광들이 만들어낸 각종 소프트웨어, 한계를 모르는 애니메이션의 상상력 등을 본다면 일본 대중문화란 절망 선생 작가와 같은 오타쿠·히키코모리들이 이룬 거대한 성취라는 생각도 든다. 가장 비생산적인 삶 안에서 고도의 생산성을 이끌어낸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나 할까. 절망 선생에 감화받아 나의 비생산성을 생산성으로 전환하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는 내게 한 친구는 말했다. “이 오타쿠 작가는 만화 그리는 재능이라도 있었지. 너는 뭘로 생산성을 높이려고?” 음~, 끄덕끄덕. 절망적인 조언, 감사합니다.


'오타쿠’라 불리는 일본의 매니어 트렌드를 일본문화 전문가인 이영희 기자가 격주로 ‘코소코소(소곤소곤)’ 짚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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