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그/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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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원 서정한의원 원장

금속성 시술기구와 딱딱한 전문용어-. 차갑기만 할 것 같은 병원 진료실. 그러나 그 속엔 ‘나아질 것’이란 희망과 믿음을 공유하는 의사와 환자가 있다. 의사가 추억하는, 환자와의 ‘따뜻한 이야기’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2004년 4월, 중학교 1학년 남학생이 아버지와 단 둘이 병원을 찾았다. 대개 엄마 혹은 부모와 내원하는 경우와 달라 눈길을 끌었다. 아이는 162㎝로 또래들과 비교해 작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균키에 미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리에 앉자마자“나(160㎝P엄마 키 159㎝)를 닮아 아들의 키가 크지 않는 것 같다”는 아버지의 푸념이 쏟아졌다. 초등학교 때엔 그나마 또래보다 키가 큰 편이었는데, 중학생이 된 이후론 키 크는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 더욱이 아이는 학교 야구부원으로 막 활동을 시작하던 참이었다.“이대로 성장이 멈춰버리면 야구를 중단해야 할 것”이라는 게 아버지와 아들의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검사결과 최종 키가 170㎝를 넘지 못하면 야구를 포기시키겠다고 했다. 검사결과 아이는 또래보다 사춘기가 14개월 정도 빨리 진행돼 성장판이 상당히 닫혀 있는 상태였다. 이를 감안한 아이의 최종 키는 167㎝. 사실대로 말을 하기가 힘들었지만 “야구를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실망하는 빛이 여실한 아버지는 “마음이 아파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는 “175㎝만 되게 해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키워왔던 야구선수의 꿈을 버릴 수 없다는 것. 투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는 “어느 정도 키가 돼야 스트라이크 존이 넓어 선수생활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하는 데까지 해보자’는 데 뜻을 같이 한 후 치료가 시작됐다. 성조숙증 치료가 우선이었다. 치료 초기엔 성장판 닫히는 속도를 늦추면서 성장기간을 늘려주는 치료가 진행됐다. 이후 성장을 촉진하는 약물요법과 운동요법이 적용됐다. 체중관리를 위한식이요법도 병행됐다. 당시 아이의 체중은 64kg으로 이러한 과체중이 성조숙증의 원인 중 하나로 판단됐다. 치료한 지 1년이 지나면서 성장속도는 정상이 됐다. 중학교 2학년 때엔 3학년 선수들을 제치고 주전선수가 됐다. 현재 고등학교 1학년인 아이의 키는 182㎝. 물론 야구선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가끔 아들과 함께 병원에 들르는 아버지는 아들 자랑에 침이 마른다. 의사인 나 역시 그런 아이를 보는 것이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키가 큰다는 것이 단순히 몇㎝느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의 꿈이 자라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아이가 키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졌거나 부모가 작아 걱정이 된다면“유전인데 어쩔 수 없지 뭐”하고 쉽게 포기하거나 “언젠간 크겠지”라며 팔짱만 낄 게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치료법을 찾아보길 권하게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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