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파리의 마지막 탱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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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학생데모의 불길은 이탈리아로 옮겨붙었다.가장 먼저 소요가 발생한 곳은 북부 토리노였다.
학교 이전과 제도개혁에 반발한 토리노대학생들은 1개월간 학교를점거했다.사태는 반체제운동으로 발전했으며,전국 46개대학중 27개대학이 참여했다.
젊은이들의 분노는 이탈리아 영화계에도 충격을 줬다.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체제파괴」를 선언했다.파졸리니의 이같은행동은 감독협회를 분열시켰다.일단의 젊은 감독들이 파졸리니를 따랐으며,이들에게 「신(新)이탈리아파」라는 이름 이 붙었다.신이탈리아파 리더는 마르코 베로키오였다.베로키오는 67년 당시 중도좌파 연립정권에 참여하고 있던 통일사회당을 날카롭게 비판한영화 『중국은 가깝다』를 발표,68년 총선에서 통일사회당이 패배하는 원인이 됐다.
베로키오와 함께 촉망받은 또 한사람 젊은이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였다.시인이자 평론가인 아틸리오 베르톨루치의 아들인 그는로마대학 재학중 파졸리니의 조수로 영화를 시작했다.첫작품 『죽음의 신』(62년)은 파졸리니가 각본을 써준 것 이다.두번째 작품 『혁명전야』(64년)는 비록 흥행엔 실패했지만 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60년대말 베르톨루치는 이탈리아공산당에 입당했으나,영화를 정치와 혼합하는 것은 거부했다.
베르톨루치는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감독은 아니었다.그러나 72년 『파리의 마지막 탱고』가 발표되자 폭발적 인기를 누리게 됐다.중년남자와 젊은 여인 사이의 변태적 사랑을 그린 이 영화에서 베르톨루치는 성(性)을 통한 사회적 갈등을 표 현하고자 했다.그러나 본래 의도와 달리 대담하고 과격한 성묘사가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일부 국가에선 상영이 금지됐다.베르톨루치는 그후이탈리아 현대사를 다룬 대작 『1900년』(76년),근친상간을주제로 한 『루나』(79년)등을 만 들었으며,88년 『마지막 황제』로 아카데미상 9개 부문을 수상했다.
다음달 24년만의 『파리의 마지막 탱고』 한국 상영을 앞두고얼마전 런던에서 한국기자들과 만난 베르톨루치는 예술과 외설(猥褻)의 차이가 메시지 전달이란 사회적 기능의 유무(有無)에 있다고 말했다.메시지 없이 무분별한 성적 표현이 판치는 영화에 젖어온 우리 관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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