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밭산책] 권력, 그 집요한 욕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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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흐자드의 세밀화 『유스프의 유혹』(1488년).헤라트에서 술탄 후세인 미자르를 위해 제작.

“나는 지금 우물 바닥에 시체로 누워 있다. 마지막 숨을 쉰 지도 오래되었고 심장은 벌써 멈춰버렸다. 그러나 나를 죽인 그 비열한 살인자 말고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확실히 독특하다.

1591년 눈 내리는 이스탄불의 외곽에 버려진 시신의 시점으로 시작한 이 소설의 화자는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들 말고도 이처럼 시체, 나무, 금화, 빨강색, 그림 속의 개 등 다양하다.

블록을 쌓아가는 것처럼 주변에서 중심으로 서서히 건축을 하듯 다가와 1권이 끝나갈 무렵이면 거의 윤곽선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책에서 손을 떼기 힘들어진다. 얼핏 터키판 『장미의 이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탄의 밀서에 얽힌 살인범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렸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 결국 이 소설도 한 시대가 바뀌는 어느 길목에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측과 낡은 것을 고수하려는 세력 사이의 치열한 투쟁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기는 결국 이런 시기가 아니라면 훗날의 소설가들이 그 시대를 들여다볼 이유가 무엇일까마는.

전통적인 화풍을 고수하는 것과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는 것, 신성 모독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의 대립은 동양적 전통을 가진 고전을 모방하는 세밀화를 그릴 것인가, 아니면 개인이 관찰한 것을 중요시하며 독창적인 개인의 창의성을 도입할 것인가의 문제로 발전해 간다.

그것은 주인공 중 한 사람이 베네치아에서 초상화라는 것을 처음 보고 돌아와 느낀 충격 때문이지만, 이미 르네상스의 물결이 터키까지 밀려와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개인의 욕구와 자유, 독창성을 부정하며 역사에 대항하려는 구세대는 이것을 이데올로기로까지 밀어붙인다.

“그런 그림은 벽에 걸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벽에 건 그 그림을 숭배하기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라는 점잖은 학자의 대화를 보고 있으면 웃음도 나온다. 고양이나 말의 구체적인 형상을 화폭의 중심에 그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논쟁에서 나온 말이다. 역사 소설만이 가지는 묘미다. 마치 『장미의 이름』의 호르헤 수사가 웃음이라는 어이없는 모티브로 살인을 저질렀듯이 말이다.

“유럽인들의 그림에서처럼 사물이 신의 마음속의 중요성을 따르지 않고 우리 눈에 보이는 거처럼 그려졌다고 하더군. 그건 아주 커다란 죄라는 거야.(중략) 가장 큰 죄는 물론 그림에 유럽인의 관점을 수용하여 술탄의 얼굴을 크고 실물처럼 세세하게 그린 거라는 거야.(중략) 우리가 유럽 화가들의 화풍을 모방할수록 우리가 그린 것은 (중략) 솔직한 묘사가 되기 시작할 거야. 코란이 금지하고 우리의 예언자가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지”라는 그들은 그리하여 결국 “세상의 더러움을 보지 못하므로 장님만이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궤변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기나 거기나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머리까지 좋으면 골치가 아프다. 그들은 인간들의 사고력을 최대한 마비시켜 그건 그저 원래 그렇다는 생각만을 하도록 대중의 눈과 입을 최대한 차단하는 것을 언제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것이 웃음의 문제도 화풍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결국 그 시대의 권력과 소유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새로운 것을 지향하는 자들은 이 시대의 전환점에서 기득권 세력에 의해 살해된다.

결국 오래된 문제, 즉 새로운 것을 가지려는 욕망보다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망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저지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물결은 “대한민국처럼(?) 전진한다는 것을 작가는 시침을 떼며 그려나간다. 언제나 역사의 전환점에서 유명한 수구들이 탄생하나 보다. 호르헤도 그렇고 이 소설의 살인자도 그렇고.

“인간은 역사를 통해 한번도, 단 한번도 교훈을 얻은 적이 없다”는 헤겔의 말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500년 후쯤 태어난 작가는 오늘의 한국을 어떻게 묘사할까.

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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