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칼럼>영국式 족보팔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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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화에서 영국의 어마어마한 장원(莊園)을 보면 저런 곳에서 한번 살아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성(城)을 통째로 사기는 어렵지만 영주권(領主權.귀족임을 증명하는 문건으로 옛날봉건 영주들의 족보)은 쉽게 구할 수 있다.그러 나 이것을 가진다고 해서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걷을 권리가 생기거나 작위를 받는 것은 아니다.가끔 숲이 딸린 옛 성터가 포함되는 적도 있지만 보통은 그냥 타이틀뿐이다.
따라서 대개 영주권을 취미로 산다.그 배경엔 물론 영국의 역사및 귀족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지금도 프린스 찰스의 사생활은 세계 어디서나 화제거리가 된다.우리가 조선시대 백자나 그림을 모으는 것과 다를 바 없다.혹 현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을 때 그 근처 술집이라도 들러 『내가 이 지방 영주요』라고 말하면 공짜 생맥주 한잔 정도는 마실 수있을 것이다.
영주권을 사는 사람의 국적이나 직업은 매우 다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유럽콤플렉스가 있는 미국인이 비교적 많이 사는 편이지만 러시아인,심지어 일본인도 심심찮게 산다고 한다.영주권이 기업인들에게 인기있는 이유는 뭘까.골프가 그렇듯이 사람 만나는기회로 생각하는 것일까.하기야 이 「종이귀족」들은 정기적으로 친목모임을 갖고 있어 고급 사교클럽에 가입하는 정도로 여길 수도 있겠다.각국의 「귀족」들과 어울리는 기회로 삼든지,아니면 손자 돌선물로 줄 수도 있다.비록 종이쪽지에 불과하지만 어쨌든남자는 로드,여자는 레이디가 된다.
영주권의 투자가치도 나쁘지 않다.10년쯤 두면 가격이 10배로 뛰는 일이 종종 있다.최근의 가격상승은 『센스,센서빌리티』같은 영화의 영향이 컸던 것이 사실이지만 영주권을 파는 쪽에서보면 수백년동안 대를 물려온 가보를 돈이 궁해 처분하는 경우가대부분이어서 경기가 요즘처럼 좋을 때는 값을 높여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격이 엄청나게 비싼 경우는 많지 않다.수천달러짜리도 수두룩하고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름난 집안의 족보도 5만달러면 살 수 있다.유럽에서 가장 역사적인 장소중 하나로 꼽히는 토턴(장미전쟁중 요크가의 에드워드 4세가 랭커스터가에 대승을 거둔 곳)지방의 영주권은 우리 돈으로 1천만원을호가한다.
영주권을 사기 위해 영국에 갈 필요는 없다.몇개의 이름난 전문경매회사에 전화로 연락,가격과 절차를 알아보면 된다.다만 쇼핑.보신관광으로 이름난 한국사람들이 이번에는 영주권을 싹쓸이한다는 소문이 나지 않기 바란다.
권성철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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